낯선 곳에서의 날선 설렘

소금을 흩뿌려놓은 듯 새하얀 봉평 메밀꽃밭

새 날 2013. 10. 6.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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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1일 오전 7시에 출발한 버스는 10시가 채 되지 않아 봉평에 도착한다.  오는 내내 에어컨에 시달려 차안은 무척 냉랭한 분위기였지만, 봉평의 외기에 비하면 그래도 따뜻한 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봉평 땅을 밟는 순간 싸늘한 봉평의 찬 기운이 온몸을 감싸 안는다.  긴 팔 웃옷을 챙겨오지 않은 게 후회될 정도다. 

 

 

주변을 흐르는 흥정천은 여전히 맑다 못해 투명하다.  효석문화제 행사장에 가기에 앞서 우선 메밀밭과 이효석문학관을 둘러보기로 한다.

 

 

메밀밭 초입에 묶여있는 당나귀,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주인공인 허생원이 반평생을 나귀와 함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소설 속에서는 노쇠한 나귀의 모습이 비교적 생생히 묘사되어 있는데, 이곳의 나귀는 아직 어린 녀석 같았다.  식사 중인지라 정신 없이 풀떼기만 우물거리고 있는 녀석..

 

 

소설 속에서의 메밀꽃밭은 늦은 밤 교교한 달빛이 흐르는 가운데 마치 소금을 흩뿌려놓은 듯 숨막힐 듯 새하얗게 묘사되어 있다.  물론 주변엔 불빛이 전혀 없었을 테고, 오로지 달빛만이 존재하기에 이에 반사되어 더욱 흰색이 도드라져 보였으리라.  



그에 비해 이날 실제 본 메밀꽃밭은 하얗다기보다 약간은 누르스름한 색에 가까웠던지라 소설 속에서의 느낌 만큼 확 와닿지는 않았다.  낮과 밤의 차이?

 

 

수년전부터 이곳을 방문하려 했건만 여건상 여의치 않았던 터, 이번엔 추석 연휴와 겹쳐 정말 천운이랄 정도로 절묘하게 기회가 닿은 것이다.  남들 다 해본다는 메밀꽃밭 속에서의 사진 찍기, 당연히 해봤다.

 

 

근대소설 속에서 흔히 등장하는 물레방앗간, 메밀꽃 필 무렵에서도 여지 없이 등장하며, 소설의 흐름상 매우 중요한 장소적 배경이 되기도 한다.

 

 

물레방아의 규모가 상당하다.  웬만한 성인 남성의 키를 훌쩍 넘을 정도로 크고 웅장하다.  이제껏 보았던 물레방아 중 가장 컸던 걸로 기억된다.

 

 

흐르는 물의 위치에너지를 물레방아의 운동에너지로 전환하여 다시 곡식을 빻는 지혜, 이곳은 물레방아의 운동에너지를 이용한 디딜방아 등이 장치되어 있다.

 

 

물레방앗간 옆으로 난 둘레길을 이용해 이효석 문학관으로 향했다.  입구의 모습이 독특하다.  이효석의 작품 이름으로 된 책 모양으로 기둥을 형상화했다.  문학관의 규모는 제법 컸다.  건물은 몇개동이 되지 않았지만, 부지가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문학관 내에선 물론 사진 촬영 금지인데, 내부 분위기가 어떤지 살짝 보여주고자 슬쩍 한 컷.

 

 

오른쪽 녹색 이미지는 이효석이 평양에서 살던 시절의 실제 사진이고, 왼쪽은 그를 흉내내어 형상화한 모형.  이효석의 대표 작품들이 쓰여진, 아마도 평양의 '푸른집' 실내를 형상화한 듯하다.

 

 

문학관 정상 부근에서 바라다보이는 봉평의 마을 모습, 여느 작은 시골 마을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문학관을 나와 우측으로 조금 가다 보면 이효석 생가가 나온다.  물론 과거의 건물들은 없고 모두 새로 지어진 것들이다.  아울러 실제 생가는 이곳으로부터 7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나 개인이 소유하고 있어 부지 매입이 여의치 않아 이곳에 건립했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생가에서 나와 다시 우측으로 조금 더 가다 보면 달랑 한 동으로 이뤄진 붉은 기와의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이효석이 평양에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던 시기 머물던 '푸른집'이란다.  이 건물 이름의 기원은 이미지에서처럼 건물 외벽을 감싸고 있던 파란 담쟁이 덩굴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곳에 조성된 푸른집의 덩굴은 왠지 푸르지 않고 붉었다.

 

워낙 유명한 연례 행사인지라 한 번은 꼭 가보리라 마음먹고 있던 터다.  비록 메밀꽃 필 무렵이 아닌, 거의 질 무렵인 듯하여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지만, 소설 속에서의 허생원과 그 주변 배경 등이 오버랩되며 보다 생생하게 와닿는 느낌만은 확실히 살아있었다.

 

이곳의 관람을 마치니 어느덧 점심시간, 허기를 달래기 위해 봉평 전통 5일장에 들러 이곳의 특산물인 수수부꾸미, 메밀전병, 메밀국수 등을 흡입하고, 행사장 내에 마련된 독서 쉼터의 시원한 그늘에 앉아 꽂혀있던 소설 한 권을 꺼내든 채 반은 졸고 반은 비몽사몽으로 앉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햇살은 여전히 따가워 그냥 돌아다니기엔 무척 부담스러운 날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햇빛만 피하더라도 그리 덥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  맑은 흥정천이 흐르는 봉평의 작은 마을, 해질녘 근처 막걸리집에 들러 술 한 잔 걸치고 있으면 왠지 허생원과 조선달 그리고 동이가 나타나 동석하자고 할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가 조용히 느껴지지만, 아쉽게도 우린 왔던 길로 다시 가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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