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덜 여문 감이 무르익기까지.. 영화 <고당도>

새 날 2026. 2. 10.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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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임종 전 치러지는 장례

 

모 병원의 간호사로 근무 중인 선영(강말금). 뇌사 상태인 그녀의 아버지가 현재 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 최근 임종이 임박했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선영의 동생 일회(봉태규) 내외가 이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병원을 방문한다. 이들에겐 특별한 목적이 있어 벌써부터 장례 준비에 돌입한 상태다. 한편 일회의 아들이자 선영의 조카 동호(정순범)는 그 해 의대에 합격했으나 가정 형편 때문에 입학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 선영은 동호를 어떻게든 대학에 보내야 한다며 일회를 다그쳐 보지만, 현실 앞에서는 묘수가 없다. 

 

영화 <고당도>의 한 장면 © (주)트리플픽쳐스

 

그러던 중 일회의 아내 효연(장리우)이 미리 작성해 놓은 부고 문자를 실수로 발송하는 사달이 벌어진다. 상대는 일회 고모. 선영은 고심 끝에 장례를 치르기로 한다. 고모는 원래 부유한 데다, 과거 어머니 장례 때 꽤 많은 돈을 부조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이 부조금으로 동호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닌가. 아버지는 어차피 임종을 앞두고 있으니 장례를 조금 일찍 치른들 크게 문제될 게 없다는 나름의 명분도 앞세웠다. 이렇게 하여 치러진 장례.

 

영화 <고당도>의 한 장면 © (주)트리플픽쳐스

 

영화 <고당도>는 아버지의 임종을 앞둔 한 가족이 조금 이른 장례를 치르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린 블랙 코미디다. 이들 가족에게 연이어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결국 돈 때문.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무리수. 이들 가족이 빚어내는 이야기와 몸짓은 표면적으로는 우스꽝스러운데, 왠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빚 독촉에 시달리는 동생

 

사업에 실패한 뒤 사채에 손을 댄 일회는 돈을 갚지 못 해 빚 독촉에 나선 채권자들로부터 쫓기는 신세다. 병원에 도착한 뒤에도 그들이 나타날까 봐 좌불안석에, 노심초사해 하는 상황은 계속된다. 그런 일회에게는 천재일우와도 같은 기회가 다름 아닌 아버지의 장례. 가만히 앉아 자리만 지켜도 손에 목돈을 쥘 수 있으니 말이다. 아버지의 장례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을 만큼 일회의 삶은 막장에 한층 가까워지고 있었다. 

 

영화 <고당도>의 한 장면 © (주)트리플픽쳐스

 

선영이 예측한 대로 고모의 마음 씀씀이는 깊고 넓었다. 동호의 등록금 걱정 따위는 당장 거둬들여도 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일회가 발목을 잡는다. 고모의 부조금을 일회가 몽땅 차지한 것. 장례식장까지 뒤쫓아온 채권자들 때문이다. 동호의 대학 입학만큼은 어떻게든 성사시켜야 하는데, 이 와중에 빚 독촉에 시달리면서 신변 위협을 받는 동생 또한 나 몰라라 하기도 어려운 상황. 선영의 고심은 한층 깊어진다.

 

영화 <고당도>의 한 장면 © (주)트리플픽쳐스

 

결국 또 한 차례의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하는 선영. 이번에 치르는 장례식은 앞서의 경우와 달리 모든 조문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데다, 병원과 장례식장 관계자까지 모든 사람들을 감쪽 같이 속여야 하는 사안이기에 철저한 사전 준비가 요구된다. 아직 임종하지도 않은 아버지를 서류상 임종한 것으로 조작하고, 아버지를 병실에서 임시 거처로 옮기는 등 상당한 위험 부담이 따르는 시도이기도 하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장례식과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대는 가족들. 이들의 계획은 뜻대로 이뤄질 것인가.

 

거짓이 빚어내는 나비효과

 

거짓을 덮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이 사용되고, 그러다 보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곤 한다. 영화 <고당도>는 실수로 보낸 부고 문자가 이들 가족이 맞닥뜨린 현실과 조응하면서 나비효과를 일으키는 과정을 코믹하지만 씁쓸하게 그려낸다. 가짜 장례는 또 다른 가짜 장례를 낳고, 그 가짜 장례는 또 다른 무리수를 만들어내면서 이들 가족이 겪는 혼란은 한 마디로 점입가경에 이른다.

 

영화 <고당도>의 한 장면 © (주)트리플픽쳐스

 

가족 공동체란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혈연에 의해 엮인 관계. 때문에 다른 관계와는 달리 단절도 여의치 않다. 선영의 사례가 바로 그러하다. 공동체에 해악만 끼치는 동생과 당장 절연하고 싶어도 생각처럼 쉽지 않다. 아니 그저 얼굴만 안 보고 살아도 지금보다는 마음이 훨씬 편안할 듯한데, 이마저도 녹록지 않은 게 현실이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타인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들 가족을 두고 하는 말인 듯. 

 

우리는 영화 <고당도>를 통해 세 종류의 감정을 맛보게 된다. 비록 뇌사라고 하지만 멀쩡히 숨 쉬고 계신 아버지를 옆에 두고 자식들이 장례식을 치러야 하는 참담함. 장례식까지 우루루 몰려 온 채권자들에게 가족들이 한 번만 봐 달라고 무릎 꿇은 채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비굴함. 부모와 자식, 그리고 남매 사이마저도 등을 돌리게 하는 비정함. 그렇다면 이들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그 원류는 무얼까. 돈이다. 관계를 좋게 하는 것도,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도 다름 아닌 돈. 돈이 직조해내는 이러한 감정은 그래서 전반적으로 씁쓰름하기 짝이 없다. 

 

가짜 장례를 준비할 당시 가족 중 누군가 한 입 베어문 감의 맛은 그들의 관계처럼 떨떠름 그 자체였을 것이다. 덜 여물었기에. 하지만 잇단 사건들이 모두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가족들이 한 입씩 베어문 감의 맛이란. 앞서와는 달리 달달했을 것이다. 이른바 고당도의 맛. 그 사이 무르익었기에. 이들 가족의 관계 역시 잘 익은 감처럼 함께 고난을 극복하면서 더욱 성숙해지고 단단해지지 않았을까. 

 

 

감독  권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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