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8개의 공간 8개의 에피소드.. 영화 <도시중독자들>

새 날 2026. 1. 30.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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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각기 다른 공간. 저마다 사연을 품은 사람들이 서로 마주한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등장 인물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다. <도시중독자들>은 총 8개의 짧은 에피소드를 묶은 옴니버스 영화. 한 개의 에피소드마다 2인의 인물이 등장하는 독특한 형식의 드라마다. 

 

8개의 공간 8개의 에피소드

 

좁은 자동차 안, 취객과 대리기사 사이에서 벌어지는 당혹스러운 이야기는 관객의 웃음을 유발해 온다. 대리운전을 의뢰하는 차주는 대부분 취객인 데다 야심한 시각에 이뤄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 보니 극 중 두 사람처럼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겠구나 싶다. 어쩌면 애교 수준일지도 모를 일. 현실은 훨씬 더 매운 맛 아닐까. 다만, 차주의 내면에 흐르는 감정을 굳이 헤아려 보자면 고독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버일까.

 

차 안에서 영화 <도시중독자들>의 한 장면

 

헬스 트레이너와 수강생 간 밑도 끝도 없는 실랑이. 트레이너가 여성의 심리를 전혀 헤아리지 못 하는 눈치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수강생의 억지일까. 아무튼 이해 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과 이해가 어려운 사람 사이의 좀체 줄어들 줄 모르는 간극의 답답함은 고스란히 관객의 몫. 강사에겐 툭 까놓고 말해서는 안 되는 뭐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이런 게 바로 남자 사람과 여자 사람의 차이라는 그것?

 

건물 옆에서 영화 <도시중독자들>의 한 장면

 

좁은 골목길, 불법주차 차주와 해당 차량을 신고하려는 사람이 맞붙었다.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헤아려 달라며 읍소하는 차주. 차주의 사정 따위는 애시당초 관심 밖이라는 듯 직진만을 고집하는 신고예정자. 사소한 시비에서 불 붙은 실랑이는 점차 감정 싸움으로 소모되는 양상이다. 양보 없는 두 사람. 누가 더 찌질한가를 놓고 기싸움이라도 벌이려는 걸까. 

 

골목길에서 영화 <도시중독자들>의 한 장면

 

성폭력 피해자 가족과 가해자 가족이 카페에 마주 앉았다. 각자의 주장이 첨예하니 이들이 나누는 대화 역시 공허할 수밖에. 그나마 입장 차이를 확인하는 자리였다면 나름의 의미가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혹여 법정 다툼을 대비한 탐색전 성격을 띤 것이라면 그 또한 성과는 있었을 듯. 잘잘못을 떠나 아주 작은 손해조차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 결국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겠지.

 

카페에서 영화 <도시중독자들>의 한 장면

 

유흥가 뒷골목에 기대어 서서 담배를 피우는 여성. 노래방 도우미다. 표정을 보아 하니 무언가 심각한 일이라도 벌어진 듯. 사실 그녀는 손님 접객 도중 뛰쳐 나왔다. 뒤쫓아 온 매니저가 그녀를 닦달한다. 진상 손님 때문이었다는 도우미의 항변. 매니저는 도우미를 쥐 잡듯이 몰아세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세가 뒤집어진다. 알고 보니 매니저는 도우미보다 훨씬 어린 데다 신출내기.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겸비한 도우미에겐 애송이였던 것. 사람의 관계란 참으로 신묘하다.

 

뒷골목에서 영화 <도시중독자들>의 한 장면


언니라고 불리는 여성이 다른 한 여성의 집을 방문한다. 두 사람은 글쓰기라는 관심사로 연결돼 있다. 동호회 회원이었을까. 아니면 같은 학과 출신? 아무튼 언니는 동생이 새로 장만한 복층형 오피스텔을 집들이 겸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반갑다며 서로 인사를 나누던 두 사람 사이에 어느 순간 묘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그러니까 평범해 보이는 대화 속에 왠지 뾰족함 같은 걸 숨겨 놓은 느낌. 한끗 차이로 어긋나 있는 무언가가 있다. 그게 무얼까. 긴장감..  그리고 견제 심리.. 실은 첫 만남부터 왠지 그랬던 것 같다. 

 

오피스텔에서 영화 <도시중독자들>의 한 장면


도심 속 작은 공원, 두 젊은 남녀가 만났다. 둘은 과거 연인 사이. 기특하게도 특정 일시, 특정 장소에서 만나자는 1년 전 약속을  두 사람 모두 잊지 않아 오늘의 만남이 성사된 것. 비록 지금은 헤어진 사이이나 다시 관계를 이어 나가고 싶은 속내를 내비치고 있는 걸까. 조심스러운 탐색전이 펼쳐지고. 가까이 하면 멀어지려 하고, 멀어지려고 하면 오히려 가까이 하는, 청춘 남녀의 밀당이란.

 

공원에서 영화 <도시중독자들>의 한 장면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일을 맞아 도심 속 야산을 찾은 두 남매. 어머니는 이곳의 나무 밑에 고이 모셔져 있다. 두 사람은 애초 서로에 대해 불만투성이. 여기까지 오는 내내 티격태격에, 투덜거리기까지. 남매는 볼썽사나운 다툼을 이어가다가도 어머니 앞에만 서면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연출해낸다. 살아 생전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 한 걸 뒤늦게 후회하는 남매. 그런데 번짓수가 잘못됐다.. 이들 남매를 어찌하면 좋을까.

 

뒷산에서 영화 <도시중독자들>의 한 장면

 

우리의 자화상

 

현대인들의 주된 생활 공간인 도시 곳곳에서 펼쳐지는 에피소드들은 분노를 자아내거나 웃음을 선사하고 때로는 씁쓸한 감정을 전달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해 받고 싶어 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이해하려 애썼음이 분명하다. 이렇듯 각기 다른 감정을 애써 보듬으며 서로의 관계를 이어 나가려는 도시인들.

 

짧은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다양한 감정 너머엔 매듭지어지지 못 한 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도시 한 귀퉁이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을 펼쳐 보이면 이런 모습일까. 영화 <도시중독자들>은 롱테이크로 촬영하고 배경음악조차 없는 극단적인 연출로 오히려 긴 여운을 남긴다. 

 

 

감독  장재원

 

* 이미지 출처 : 영화사 반딧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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