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통역안내사 된 탈북민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취득한 한영(이설). 탈북자 출신인 그녀는 돈 벌 생각에 벌써부터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 중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안내에 본격 투입되는 그녀. 기존 가이드들의 텃세가 만만치 않은 근무 환경이지만 씩씩하게 하루를 버텨낸다. 그녀만의 직무 요령도 터득해 나간다. 일종의 생존 비법. 덕분에 실적도 덩달아 높아지기 시작한다. 이대로 쭈욱 간다면 비교적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급변하면서 중국인 관광객 숫자가 크게 감소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사드 사태. 관광산업이 직격탄을 맞는 건 시간 문제였다. 한영에게도 직접적인 타격이 가해졌다. 일거리가 크게 줄어들면서 가이드를 필요로 하는 곳이 덩달아 사라지기 시작한 것. 큰 맘 먹고 시작한 일이었건만 남한 사회에서 먹고 사는 일이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한 탈북 여성의 남한 생존기를 다룬 드라마다. 쉽지 않은 그녀의 여정은 분단 국가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냉혹한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제14회 부산평화영화제에서 도담도담 관객상을,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 배우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한영이 몸 담고 있는 관광 통역사는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들에겐 만만한 조건의 직업이 아니다. 외국인을 상대로 관광 안내를 해야 하니 외국어에 능통해야 하는 데다 자격증까지 갖춰야 하는, 진입장벽이 비교적 높은 직무다. 그래서 대다수의 탈북민들은 한영의 친구 정미(오경화)처럼 직업적 만족도가 크지 않으면서 진입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은 요양보호사 등의 직무를 선택한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
성실한 데다 매사 똑부러지기까지 한 한영은 자신만의 역량을 키워가며 업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져가지만, 국제 환경 변화에 따른 업황의 부침에는 천하의 그녀인들 당해낼 재간이 없다. 더구나 함께 탈북한 남동생 인혁의 행방이 최근 묘연해진 탓에 불안감마저 증폭된 상황. 탈북민 개개인의 신변 보호를 책임지는 정보기관 담당자(박준혁)의 감시 아닌 감시까지 더해지니 그녀의 답답한 심정은 더욱 옥죄어 온다.
탈북민을 향한 대중의 시선은 대체로 곱지 않다. 그들에게는 의문부호 하나가 늘 꼬리표처럼 따라 붙는다. 주어진 여건에서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보지만, 그때마다 이들에게 돌아오는 답변은 한결 같다. "탈북민을 어떻게 믿어."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낙인.

어느 누구보다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한영인들 이렇듯 불편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녀가 거쳐 가는 곳은 어디가 됐든 의뭉스러운 시선이 그녀와 늘 한 몸처럼 붙어 다닌다. 오늘날 남한에 적을 두고 살아가는 대다수 탈북민들의 현실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사드 사태의 여파로 완전히 종적을 감춘 일자리. 한영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 다행히 신변 보호 담당자 임태구가 그녀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알선해 준다. 하지만 탈북민이라는 이유로 또 다시 고배를 마시는 한영. 이 넓디넓은 남한 땅에 그녀를 위한 일자리는 과연 없는 걸까. 결국 한영은 알바를 전전하는 불안한 삶 속으로 내몰린다.

힘들 때마다 서로에게 위안이 돼 주었던 탈북민 친구 정미. 한영에겐 몇 안 되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겉 모습만 비슷한 이방인의 삶을 견디지 못 하고 결국 그녀의 곁을 떠나겠다고 폭탄 선언을 한다. 하지만 이런 절친의 돌발 행동에도 한영은 그저 쿨한 반응뿐. 절친과 달리 그녀는 이 치열한 생존경쟁 여건 속에서도 혼자서 살아갈 신념과 강단이 있기 때문.
나를 믿을 수 있나요
한영의 삶이 늘 불안했던 건 직장을 잃어서도, 친구가 떠나가서도 아니다. 남한에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 하고 방황하는 동생의 불안정한 삶의 태도 때문이다. 남한 사회에서 떳떳하게 살아가고 싶은 그녀에게 동생의 모습은 바로 '믿을 수 없는 사람'의 전형. 그러니까 그녀의 삶을 갉아먹는 불안감의 기저엔 바로 이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일종의 부채 의식 같은 게 깔려 있는 셈이다.

남한 사회는 지구 상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곳 가운데 하나. 경제 체제가 전혀 다른 사회에서 온 이들에겐 적응이 쉽지 않다는 의미이다. 하물며 편견이나 차별까지 더해진 상황이라면 어떨까. 모르긴 해도 극 중 한영의 주변 인물들이 그랬듯이 다수가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전락할 듯.
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탈북민들의 녹록지 않은 남한 내 삶을, 한 여성을 통해 들여다 본다. 극의 말미, 한영은 임태구에게 자신을 믿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앞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한영. 그녀가 어디로 향할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극이 열린 결말로 마무리되기 때문. 다만, 그녀에게 부채 의식이 존재하는 한 비록 갈짓자 행보라 하더라도 방향성은 결국 특정한 곳을 향하리라 믿는다. 그녀의 삶을 응원한다.
감독 곽은미
* 이미지 출처 : 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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