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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재능은 약인가 독인가.. 영화 <빅 페이크>

새 날 2026. 1. 2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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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입성한 화가 지망생

 

고향 땅을 떠나 로마에 입성한 토니(피에트로 카스텔리토). 화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생계 유지를 위해 거리 위로 나선다. 초상화를 그리며 밥벌이를 해 오던 어느 날, 아트 딜러인 도나타(줄리아 미켈리니)와 연이 닿게 되고. 토니의 천재적인 모사 실력을 단박에 알아본 그녀는 토니가 직접 그린 유명 화가의 모사 작품을 비싼 가격에 매입하게 된다. 자의 반 타의 반, 모사 예술이라는 낯 선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토니. 

 

그러던 어느 날, 도나타를 통해 알게 된 폭력 조직의 우두머리인 발보(에도아르도 페세)로부터 조직원의 여권 위조를 부탁 받게 되고 이에 흔쾌히 응하는 토니.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들은 토니의 절친 파비오네(피에를루이지 지간테)가 소속돼 활동 중인 극좌 테러 단체 '붉은 여단'과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는 조직이었다. 얼마 후 우파 의원인 모로가 붉은 여단에 의해 납치됐다는 소식이 긴급 타전되고. 부지불식 간 좌우 정치 세력 사이의 이해관계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는 토니. 

 

영화 <빅 페이크>는 좌우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1970년대 후반 이탈리아가 배경이며, 천재적 모사 재능을 지닌 화가 지망생이 정치적 이해 관계에 얽혀들면서 그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다. 도입부의 자막을 통해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음을 밝히고 있다. 실존했던 인물 안토니오 치키아렐리의 삶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혀드는 토니

 

파비오네가 개인적으로 부탁한 일들을 사심 없이 처리해 주는 토니. 하지만 그가 한 행위는 결과적으로 붉은 여단의 조직적 움직임에 가담한 꼴이 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현미경처럼 속속들이 들여다 보던 범죄 단체와 정보 조직은 토니의 행위를 예의주시하면서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해 나간다. 탁월한 모사 재능, 그리고 붉은 여단과의 연결고리만으로도 토니의 이용 가치는 충분하다고 판단한 덕분. 

 

영화 <빅 페이크> 포스터 ©넷플릭스

 

이후 토니는 자신만의 모사 예술의 범주를 크게 확장시켜 나간다. 물론 타의에 의해. 유명 미술 작품으로부터 시작된 이 예술 세계는 신분증을 넘어 어느덧 도장, 직인 그리고 서명과 문서 등 광범위한 영역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의 손을 거치면 마치 복사기로 찍어낸 듯 감쪽같은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하지만 그의 놀라운 손재주가 스스로를 정치적 극한 대립의 복판으로 몰아세우면서 토니는 덫에 걸린 생쥐마냥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탈출을 시도할수록 날카로운 덫이 피부 깊숙이 파고드는 악순환.

 

극 중 도나타는 토니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재능이 아예 없는 것보다 어중간한 재능이 사람을 괴롭게 한다"고. 애초 재능 따위가 없었다면 화가 같은 건 꿈조차 꾸지 않았을 테지만, 토니처럼 약간의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 무언가가 되겠다는 희망 고문에 빠져들기 쉽다는 사실을 꼬집은 대화다. 뛰어난 모사 능력이 있는 바로 이 어중간한 재능이 토니를 진짜 예술가의 길로 접어들지 못하게 막아서고 결국 범죄자로 전락케 한 것. 

 

혼란스러운 시대상

 

토니의 또 다른 절친 비토리오(안드레아 아르칸젤리). 그의 직업은 천주교 사제다. 자유분방한 성향의 토니, 그리고 자신의 신념에 삶을 올인한 파비오네와 달리 그는 신부라는 직업에 걸맞는 반듯하고 청빈한 삶을 살아온 듯 보인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 비토리오 캐릭터가 웅변해 보이지만 말이다. 영화는 토니나 파비오네와 달리 딱히 특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이 비토리오를 이야기의 또 다른 축으로 끌어들인다. 왜일까. 좌와 우가 그렇듯,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없는 이 세상의 이치를 말하고 싶었음이리라.

 

영화는 화가가 꿈이었으나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 받지 못 한 주인공이 정치 조직과 범죄 단체에 의해 체제 유지를 위한 정치 공작의 도구로 소모되는 과정을 드라마틱한 연출로 스크린 위에 옮겼다. 절친 파비오네와 달리 정치와는 일면식도 없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캐릭터를 앞세워 극한 정치적 대립이 직조해내는 당시의 혼란스러운 시대상을 소환한 것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며 그 결과는 자신의 몫이라고 하지만, 어중간한 재능으로 꿈과 멀어지고 범죄자의 길을 걷게 되는 토니의 삶은 너무도 안타깝다. 그와 엮이며 모진 고초를 겪게 되는 친구들의 삶은 또 어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감상했으니,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감독  스테파노 로도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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