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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자 누아르.. 영화 <어리석은 자는 누구인가>

새 날 2026. 2. 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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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조직 말단의 그들

 

누군가의 호적을 팔고 사는 일을 하는 타쿠야(키타무라 타쿠미). 막다른 길에 몰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이들이 주로 그의 표적이 됐다. 타쿠야가 이쪽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전 그 역시 비슷한 경로로 호적을 정리한 바 있다. 마모루(하야시 유타)는 타쿠야의 곁에서 일을 배우며 신분 세탁 작업을 함께 진행하는 신출내기 조직원. 두 사람의 케미는 남달랐다. 때로는 형과 아우, 때로는 친구 사이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타쿠야는 조직의 윗선인 중간책으로부터 보스의 비자금을 훔치자는 제안을 받는다. 매우 은밀하게. 위험을 무릅쓰는 일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그 역시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자신이 처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타쿠야. 결국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나 이는 치명적인 함정이었다. 타쿠야는 보스의 비자금을 훔친 배신자라는 누명을 홀로 뒤집어쓴 채 조직에 의해 쫓기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영화 <어리석은 자는 누구인가>는 치밀하게 사전 기획된 윗선의 음모에 의해 배신자로 낙인 찍힌 범죄 조직원의 위험천만한 조직 이탈기를 그린 드라마다. 범죄 조직 말단에서 음습한 일에 몸담는 조직원들과 비정하기 짝이 없는 범죄 세계를 묘사한 액션 누아르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부산 어워드 배우상을 수상했다.

 

야쿠자의 세계에서 조직원의 배신 행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사안. 잔혹한 보복은 기정사실이다. 타쿠야는 사전에 낌새를 알아차리고 탈출을 모색하였으나 이미 늦은 감이 있다. 조직이 그의 움직임보다 훨씬 민첩했기 때문이다. 만신창이가 된 타쿠야의 육신. 그는 곧 한적한 곳에 위치한 모 병원으로 옮겨질 예정이다. 병원까지 타쿠야의 운송을 책임진 조직원은 다름 아닌 카지티니(아야노 고). 그는 과거 타쿠야의 신분을 세탁해 주고 그를 조직원으로 끌어들인 선배격 인물이다.

 

 

탈출을 꿈꾸다

 

조직을 배신한 대가는 혹독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그나마 대화가 가능한 몸 상태였다는 점과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점 정도. 타쿠야를 차에 태우고 모처에 위치한 병원으로 이동하는 카지티니.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저 묵묵히 조직의 지시를 따라 병원에 신병을 넘기면 그만이었을 텐데. 특별한 인연으로 엮이지 않았더라면 감정의 동요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을 텐데. 이게 무슨 얄궂은 운명인가.

 

야쿠자 조직원의 한 사람으로서 조직의 지시를 거스를 수 없는 자신의 처지로 인한 자괴감, 그리고 동료의 병원 이송은 곧 그의 죽음이라는 뻔한 공식 앞에서 이대로 방치하기 어렵다는 죄책감. 이 양립 불가능한 두 개의 감정이 카지티니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며 갈등을 일으킨다. 이대로 그냥 병원으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타쿠야와 함께 탈출을 감행할 것인가. 

 

 

조직의 폭력성은 금속 이빨을 장착한 한 행동파 조직원으로 대변된다. 그가 웃을 때마다 밖으로 드러나는 금속 이빨은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예리한 칼날처럼 우리 몸 일부에 기계 덩어리를 끼워 넣은 이물감으로 다가오게 한다. SF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그의 기괴한 생김새와 커다란 덩치는 그 자체로 상대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마모루, 타쿠야, 그리고 카지티니.. 이 세 사람은 삶의 막다른 길목에서 방황하다가 신분 세탁이라는 생애 마지막 희망에 모든 걸 걸고 같은 조직에 몸 담은 케이스. 그러니까 타쿠야는 카지티니가, 마모루는 타쿠야가 각기 조직으로 끌어들인 셈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누군가의 신분 세탁을 돕고 잔혹한 야쿠자의 세계로 이끈 원죄가 다른 조직원들과는 달리 그들에겐 족쇄로 작용하고 있었다. 일종의 부채감 같은 것.

 

 

누가 더 어리석은가

 

본인과 타쿠야가 피우다 말고 길바닥에 버린 담배꽁초를 정성껏 주워 담는 그 고운 성정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카지티니는 행동으로 입증한다. 이렇듯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선택하는 카지티니는 물론, 타쿠야의 속 깊은 배려와 연민에서 비롯된 행위들 역시 뭉클한 감동을 자아낸다.

 

 

영화는 3부로 구성돼 있다. 이야기는 하나의 구조인데, 이를 마모루, 타쿠야, 그리고 카지티니의 시점과 시선으로 각각 이끌어 나간다. 동일한 사건을 서로 다른 인물의 각도와 시점으로 바라보게 하는 색다른 시도인데, 좀 더 입체감 있는 연출법이다. 

 

영화 <어리석은 자는 누구인가>는 잔혹한 야쿠자 조직 말단에서 시스템의 부품으로 살아남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각오한 채 어둠의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에 과감히 도전하는 세 인물의 탈주극을 통해 과연 어떤 삶이 더 떳떳한지 묻고 있다. 조직의 일원이 되어 범죄의 굴레에서 살아가는 자와 그러한 굴레를 과감히 떨쳐내려는 자 가운데 어리석은 자는 과연 누구인가. 

 

 

감독  나가타 코토

 

* 이미지 출처 : (주)플레이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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