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씨 30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 온 집안이 제사 준비로 분주하다. 할머니(손숙)의 진두지휘 아래 딸, 며느리를 비롯한 집안의 여성들은 전을 부치는 등 차례 음식 장만에 여념이 없다. 반면 큰 아들 태근(오만석)을 포함한 집안의 남성들은 방 하나를 통째로 차지한 채 고스톱 삼매경에 빠져 있다.
연례 행사인 제사를 위해 뿔뿔이 흩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본가로 향한다. 이집 장손인 성진(강승호)도 방금 도착한다. 손주를 향한 할머니의 환대가 극진하다. 얼마 후 해외에 사는 성진의 작은 고모 내외도 도착한다. 와야 할 사람들은 이제 다 모인 듯. 집안의 어른 승필(우상전)의 눈치를 슬쩍 살피다가 시간 조율에 나선 손주들. 덕분에 이번엔 비교적 이른 시각에 차례를 지낼 수 있게 됐다. 두부공장을 운영하며 가업을 이은 태근은 아들 성진에게 이를 물려 주겠다며 떠벌리지만, 정작 당사자는 관심조차 없는 듯.

영화 <장손>은 3대를 이어 온 어느 한 가족의 이야기.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과정은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작품은 제34회 부일영화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제12회 들꽃영화상과 제61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감독상을, 그밖에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 디렉터스 컷 어워즈 등에서 다양한 종류의 상을 수상했다. 제44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는 영평 10선에 든 작품이기도 하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영정사진을 들고 부랴부랴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성진. 빈소가 차려지고 가족들이 속속 모여든다. 장례는 상여 행렬이 동네 한 바퀴를 도는, 전통 방식과 절차에 따라 치러진다. 이윽고 선산에 모셔진 할머니. 사달이 빚어진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성진의 큰 고모(차미경)가 태근에게 다짜고짜 자신의 통장을 달라고 요구한 것. 병원에 입원 중인 고모부의 치료비 충당을 위해 할머니에게 매달 생활비를 맡겨 왔다는 그녀의 설명이 덧붙여진다.
고모의 이 발언은 사실 여부를 떠나 가족들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만든다. 태근의 언성이 높아지는 건 당연한 수순. 고모는 고모대로 과거의 섭섭했던 일들을 모두 끄집어내며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장례 절차가 끝나자마자 할머니를 잃은 상실감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터져 나온 고모의 폭탄 발언에 가족 간 갈등의 골은 한층 깊어진다. 당혹스러워 하는 성진. 이들 가족은 과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할아버지 승필은 6.25전쟁을 겪은 세대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른 나이에 부모님을 모두 잃었다. 치매를 앓고 있는 그의 기억은 방 한켠에 걸린 '멸공' 액자만큼이나 오래 전의 시간에 멈춰져 있다. 여전히 옛 시대를 살아가는 그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다름 아닌 빨갱이. 전통을 묵묵히 계승해 온 그가 유독 장손을 아끼는 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3대째 이어져 오는, 손이 귀한 독자 집안이다.
승필의 독자 태근은 부모의 기대와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성장했다. 부모 입장에서는 이른바 큰 인물이 되길 바랐으나 태근의 삶은 의외로 굴곡져 있다.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얻은 듯한 후유증은 술만 마시면 조건반사처럼 이상 증상으로 발현되어 그를 늘 괴롭힌다. 가족들은 이런 모습에 이미 이골이 난 듯 무덤덤하다. 태근은 아버지를 묵묵히 따르면서도 내심 불만이 많은 듯.

태근의 독자 성진은 집안의 막내이자 장손이다. 그는 윗세대와는 달리 가업을 이어가려는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다. 젊은 세대답게 소신이 뚜렷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매진하는 타입이다. 아직 미혼이라 몸과 마음이 모두 자유로운 그에겐 전통의 굴레가 영 성가시고 탐탁지 않다. 비합리적인 삶의 방식에서 냉큼 벗어나고픈 생각뿐. 가족끼리 돈 때문에 갈등을 빚거나 다투고, 종국엔 앙숙처럼 등을 돌리는 현상이 그의 시각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가족은 공동체다. 반면 가족 구성원 개개인은 독립된 인격체. 생각이나 가치관 따위가 저마다 다르다. 때문에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소속돼 있으면서 동시에 개인으로 존재하고픈 욕구가 충돌하는 건 비교적 흔한 현상. 피를 나눈 가족이기에 그 만큼 기대치가 커지고, 작은 차이가 되레 크게 다가오면서 갈등으로 이어지기 쉽다. 물리적으로는 가까워도 정서적으로는 멀리 느껴지곤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결국 가족이란 미워도 서로 미워할 수 없는 존재이자 가장 가까운 타인. 영화 <장손>은 가족 구성원 간 갈등 표출을 통해 서로 가깝고도 먼 존재임을 실감나게 꼬집는다.

3대에 걸친 가족 구성원. 그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소소한 이야기는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세대를 넘어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경험한 이들 모두가 적어도 하나 이상의 공감 포인트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이 작품이 뛰어난 건 마치 우리 이웃의 삶을 다큐멘터리 장르로 옮겨 놓은 듯 각각의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만큼 감독의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력을 칭찬해 주고 싶다.
흡사 수묵화를 옮겨 놓은 듯 스크린 위로 펼쳐지는 우리 땅의 고운 풍광은 작품의 뚜렷한 주제 의식과 함께 지극히 한국적인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킨다. 영화 <장손>은 3대째 이어가는 대가족 삶의 일면을 통해 가족에 담긴 우리네 보편적 정서를 이끌어낸 수작이다.
감독 오정민
* 이미지 출처 : 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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