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허들 유망주 서연(최예빈). 그녀의 기량은 출중하다. 적어도 학교 내에서는 그녀의 기록을 넘볼 만한 또래가 없다. 곧 개최될 지역 평가전에서도 우승 후보로 꼽힌다. 그런 그녀가 요즘 들어 더욱 바쁘다. 그동안 꿈꿔온 실업팀 입단을 위해 한창 담금질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김영재)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전화가 걸려온다. 부리나케 달려간 병원. 뇌출혈이었다. 당장 수술 치료를 해야 하는데 미성년인 서연은 보호자로서의 권리 행사가 불가능했다. 병원 동의서 한 장 받는 일조차 여의치 않은 상황. 서연은 어쩔 수 없이 평소 왕래가 거의 없던 삼촌에게 동의서 작성을 부탁하며 일단 급한 불부터 끈다.

영화 <허들>은 갑자기 쓰러진 아빠를 돌보게 된 한 육상 유망주 청소년의 이야기다. 부지불식간 닥쳐온 가정의 위기 앞에서 이를 헤쳐 나가려 부단히 노력해 보지만, 아이 혼자만의 힘으로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사실을 현실적인 시선으로 그려낸다. 복지 사각 지대에 놓인 돌봄 청소년의 냉엄한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아빠는 무사히 수술을 마쳤다. 그러나 산넘어 산이라 했던가. 이번엔 병원비가 서연의 발목을 잡는다. 다시 삼촌에게 부탁해 본다. 차용증까지 쓰고서야 간신히 돈을 빌릴 수 있었다. 형제 간에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야속한 감정이 든 것도 잠시. 일반 병실로 옮겨진 아빠. 혼자서는 도저히 몸을 가눌 수도 없는 처지라 간병인이 필요했다.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게 된 서연은 그래서 자신이 직접 아빠를 돌보기로 한다.

학교 생활과 육상부 활동을 병행해 오느라 평소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서연에게 아빠의 돌봄까지 더해진 상황. 자신의 시간을 쪼개고 쪼개 오롯이 아빠 돌봄에 할애하고, 여기에 수업 중 혹은 운동 중 아빠로부터 긴급 호출이 있을 때마다 병원으로 냅다 달려가야 했던 서연. 학교생활은 엉망이 돼 버렸고, 훈련에도 집중할 수 없다 보니 허들 기록은 나락으로 꼬꾸라졌다. 시간이 갈수록 몸과 마음이 동시에 피폐해지고 있었다. 서연.. 과연 이대로 괜찮은 걸까. 묘수는 없는 걸까.
서연이네는 아빠와 단 둘이 사는 한부모 가정이다. 아빠는 25톤 덤프트럭 기사로 일한다. 트럭은 아빠 소유. 부유한 가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국가나 지자체로부터 복지 혜택을 받아야 할 만큼 형편이 썩 나쁘지도 않다. 그럼에도 엄마의 부재는 서연이네 가정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결정타로 작용한다. 아직 학교에 재학 중인 서연이가 아픈 아빠를 돌보면서 동시에 엄마 아빠의 빈 자리를 메우는 역할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영화는 일견 평범해 보이던 한 가정에 들이닥친 불행의 씨앗이 점차 들불처럼 번져가며 결국 한 가정을 붕괴시키는 과정을 매우 현실적인 시선으로 담아낸다. 다급하고 불안한 상태에서의 판단과 결정은 자칫 일을 그르치기 십상. 타인의 불행을 역이용해 잇속을 챙기려는 자들의 먹잇감이 된 서연은 막다른 길에서 한숨을 돌릴 마지막 기회마저 그들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고 만다.
지자체 복지센터 창구 앞에 붙어 있는 낯 익은 글귀. '복지 사각 지대를 없애겠다' 절실한 상황에서 지자체의 창구를 두드렸더니 돌봄 지원은 아직 요건이 안 되니 충족될 때 다시 찾아 오라는 직원의 영혼 없는 답변이 돌아온다. 직원의 희망사항(?)대로 이번에는 요건이 충족돼 찾아갔더니 예산이 다 되어 지원이 불가하다는 황당한 말을 늘어놓는다. 복지 사각 지대를 없애겠다는 건 결국 헛구호였던 셈.

서연이는 학교 내에서는 물론이며 지역에서도 수위를 다툴 만큼 기량이 빼어나다. 육상은 기록이 전부이니 당연히 실력으로 실업팀 선발이 이뤄질 것으로 다들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순진한 발상. 예산 집행을 쥐락펴락하는 윗선의 생각은 달랐다. 같은 돈을 들일 바에 그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택하는 게 관행. 그 내용도 알고 보면 경악할 수준이다. 동정심을 유발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이른바 빈곤포르노를 내세운 것이다. 최근 젊은층의 화두로 떠오른 공정은 어르신들의 장난질에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
가장의 예상치 못 한 응급실 행이 불러온 파장은 점점 부풀어 오르며 한 가정을 완전히 파탄낸다. 그 과정에서 서연은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부모 없이 청소년 홀로 감당하기엔 그 무게감이 지나치게 가혹하다. 서연이 묻는다. 이렇게 될 때까지 자신을 도와준 건 누구냐고. 자신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느냐고. 이 땅의 18만 돌봄 청소년을 대신하는 이 물음에 이젠 우리 사회가 답해야 할 차례. 동일한 출발선까지는 어렵더라도 결코 뛰어 넘을 수 없는 높은 허들로 가로막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감독 한상욱
* 이미지 출처 : (주)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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