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난... 영화 <이름에게>

새 날 2025. 12. 20.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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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화 공방에서 구두 만드는 일을  하는 21살의 청년 서도경(정수현).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 받은 그는 어머니의 존재가 늘 궁금했다. 그러던 차에 그녀를 찾아 무작정 속초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그의 목적지는 속초 해변과 맞닿아 있는 민박집 '파랑새 정원'. 

 

얼마 지나지 않아 동해 바다의 황홀한 자태가 차창 밖으로 드러나고. 신기하게도 도경의 표정엔 변화가 없다. 하지만 가슴은 콩닥콩닥. 버스에서 내려 한적한 해변 마을을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가 코 앞이다. 벼르고 별러 찾아온 곳이지만 막상 아무렇지도 않은 척 들어가려 하니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입구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돌아서기를 수차례. 그러다 드디어 용기를 내는 도경. 파랑새 정원의 입구로 들어선다.

 

영화 <이름에게>는 부모에게 버림 받아 홀로 성장한 한 청년의 이야기다. 원망의 감정 속에서도 원초적 그리움에 이끌린 그가 어머니를 찾아 나서는 짧은 여정을 그린다. 극의 공간적 배경이 됐던 속초의 가을 바다는 여전히 눈 부셨고, 아주 조금씩 서로를 향해 다가서며 경계를 허무는 그와 그녀의 조심스러운 몸짓은 관객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 안는다.

 

파랑새 정원 안으로 발을 디딘 도경에게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민박집 주인 정해수(남상미). 아니 실은 그녀의 맨발이 가장 먼저 포착됐다. 신발에 관한한 나름의 가치관을 지닌 청년. 그의 예리한 눈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여성은 무척 젊고 아름다웠다. 그러니까 도경의 나이로 헤아려 보면 40은 훌쩍 넘어야 할 것 같은데. 체크인을 하고 짐을 푼 뒤 통성명하며 밝혀진 그녀의 나이 37. 그렇다면 16세에 도경을 낳았다는 의미?

 

오래된 주택을 개조하여 영업 중인 민박집 파랑새 정원은 아담한 규모였다. 손에 잡힐 듯 속초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이름만큼이나 예쁜 구조. 그런데 민박집 주인 정해수도 파랑새 정원을 왠지 닮았다. 말수가 적고 단아한 느낌의 여성이었다. 그녀가 만들어 투숙객들에게 제공하는 집밥은 민박집을 거쳐간 이들로부터 엄마가 해 주는 밥을 떠올리게 한다고 하여 이른바 '엄마밥'으로 불린다.

 

처음엔 얼굴만 확인하고 당일 올라갈 요량이었다. 그런데 마음에 미세한 동요가 생기면서 계획을 뒤바꾼다. 하룻밤 묵고 가기로 한 것이다. 정해수 그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지금의 이런 미묘한 감정을 끌림이라 표현해도 괜찮은 걸까. 도경은 왜 그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걸까. 정해수와의 접촉면이 넓어질수록 도경의  궁금증은 더욱 부풀어 오른다.

 

 

영화는 파랑새 정원 인근에 위치한 중국집 사장 김춘호(박성일), 그리고 사전 예고 없이 서울에서 무턱대고 도경을 만나러 온 수아(박현우)가 파랑새 정원에서의 여정에 합류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수아 역시 도경처럼 부모로부터 버려졌고, 그래서 도경과 함께 지내며 같은 공방에서 일하는 또래 여성이다. 춘호와 해수는 동네 오빠 동생으로 자처하는 사이이다. 실제로 어느 정도의 거리감은 있는 듯. 하지만 매 끼니를 함께하거나 퇴근 후엔 술자리도 같이하는 등 꽤나 친밀한 사이로 관측된다. 

 

어릴적 배냇 저고리와 신발을 신줏단지 모시듯 고이 간직한 도경. 이를 투숙한 방에 놓아둔 채 외출한 사이 그만 해수의 눈에 띄고 만다. 폭풍 같은 감정이 한 차례 지나고. 이후 해수의 표정 변화가 역력하다. 수아는 예의 그 에너지 넘치는 활력으로 해수와 도경이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분위기 띄우는 역할을 자처한다. 애절함이 담긴 눈빛 교환에도 어쩐지 해수 도경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침묵만 지키는데. 둘은 원망의 감정을 딛고 과연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도경은 자신이 구두 디자이너이면서도 주구장창 나이키만 신는다. 여기엔 아픈 사연이 있다. 어릴 적 부모 없이 자란 까닭에 괴롭힘의 표적이 되기 십상. 하지만 나이키를 신고 있으면 무시 당하는 일이 없었고 괴롭힘으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로웠단다. 일종의 수호신처럼 자신을 지켜주는 든든한 동반자였던 셈. 이런 도경에게 해수의 맨발은 자연스레 보호 본능을 불러 일으켰을 터. 멋진 디자인의 구두 제작을 위해 정성스레 해수 발의 본을 뜨는 도경과 이를 묵묵히 지켜보다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해수의 모습은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수아의 원래 이름은 보라다. 자신을 버리고 간 부모가 혹여 나중에라도 찾으러 올까 봐 성인이 되자마자 스스로 개명했단다. 아직은 원망의 감정이 지배적이라는 의미. 하지만 진짜 속내는 도경이 부러운 것일지도. 춘호가 수아를 향해 보라 씨라고 호칭하자 "춘호 아저씨가 불러 주니 그래도 괜찮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드러내는 건 자신을 버린 데 대한 원망의 마음 한켠에 그리움이라는 원초적인 감정이 싹 트고 있음을 웅변하기 때문이다. 수아 역시 부모 찾는 여정에 조만간 나설지도. 보라라는 이름으로.

 

실제로 강원도 7번 국도를 따라 가다 속초의 해변에 정착해 머물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영상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부모로부터 버림 받고 홀로 독립한 청년이 원망과 그리움의 모체인 어머니를 찾아가는 여정은 안타까우면서도 애틋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잔잔한 여운이 남는 작품이다. 

 

'빛나는 바다'라는 의미의 이름 해수. 바다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모태의 깊은 품을 닮았다. 생명을 길러내는 원초적 공간이기도 하다. 더불어 삶의 시작을 품고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처럼 앞으로 펼쳐질 해수와 도경의 삶도 그렇게 윤이 났으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난 또 다른 도경과 보라들의 삶도.

 

 

 

 

 

감독  윤권수

 

* 이미지 출처 : (주)스튜디오메타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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