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은 돌아가 주세요.
유독 많은 비가 내리는 날 아침. 방금 눈을 뜬 구안나(김다미)는 여느 때처럼 아들 자인(권은성)의 장난에 맞장구 쳐 주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디선가 집안으로 물이 흘러 들어오는 게 아닌가. 그 양이 적지 않아 범상치 않은 상황임을 직감한 안나. 거실 창을 통해 밖을 살펴본다. 헉.. 이게 현실일까. 바깥 세상은 이미 물에 잠겼는지 온통 물 천지였으며, 3층에 위치한 안나의 집까지 곧 집어삼킬 기세다.
다급한 목소리의 재난 방송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 나온다. 당장 대피해야하는 상황, 전화로 엄마와 안부를 주고 받는 안나. 자인은 엄마 곁에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어리광을 피우거나 치근덕대며 그녀의 정신을 홀딱 빼놓는다. 하필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급히 서두르느라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 한 안나는 자인의 손을 꼭 잡고 윗층으로의 대피를 시도한다. 물은 삽시간에 불어났다. 응축된 에너지가 해일이 되어 덮치기를 수차례. 거듭된 위기를 물리친 안나는 보안 요원(박해수)의 도움으로 마침내 목표 지점인 아파트 옥상에 도착한다.

영화 <대홍수>는 소행성과의 충돌로 지구 종말이 예고된 상황에서 인류의 명맥을 잇고자 투입된 한 연구원의 고군분투를 그린 아포칼립스물이자 재난 SF 장르의 작품이다. 얼마 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또 다른 아포칼립스 류의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을 연출한 김병우 감독이 또 다시 메가폰을 잡았다. <전지적 독자 시점>에서 곤충과 교감을 나누는 능력을 선보여 이목을 끌었던 아역 배우 권은성 군이 이번 작품에도 캐스팅됐다.

안나의 거주지인 아파트 단지를 휩쓴 물난리는 사실 전 지구적 재난 상황. 그러니까 지구가 끌어당긴 소행성이 남극 대륙과 충돌하면서 빚어진 대재앙이었다. 안나가 소속돼 있는 다윈센터는 일찌감치 지구의 종말을 예측하고 인류의 명맥을 이어나가기 위해 비밀리에 조직된 연구소. 그녀는 이곳에서 이모션 엔진 개발을 맡은 책임 연구원이다.
AI와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온 과학기술은 어느덧 생명체를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인간의 감정과 기억을 이식해야 하는데, 안나의 직무가 다름 아닌 이 엔진을 개발하는 일. 보안 요원까지 투입돼 안나의 탈출을 도운 건 지구, 그리고 인류의 운명이 바로 그녀의 손에 달렸기 때문.

안나를 탑승시킨 비행선은 다른 비행선 6대와 더불어 무사히 지구를 벗어나 목적지를 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순항 도중 불의의 사고와 맞닥뜨리게 된다. 운석이 비행선과 충돌한 것. 또 다시 재난 상황을 맞이하는 안나. 영화는 이 시점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꾀한다. 안나 스스로 실험체가 된 것.
침수 중인 아파트에서 또 다시 아침을 맞이하는 안나. 자인을 데리고 탈출에 나선다. 상황은 이전의 경험과 똑같다. 탈출로에는 같은 처지의 입주민들로 가득 들어차 있고, 거대한 해일이 덮쳐 오기를 수차례. 엘리베이터에 갇힌 소녀를 구조하지 못 해 마음이 아팠던 안나, 이번엔 당시의 경험을 되살려 소녀를 무사히 구조해낸다. 이렇듯 무한 반복되는 재난 상황 속에서 안나는 자인을 구조해야 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는다. 그녀는 과연 이 임무를 완수하고 인류의 염원을 이뤄낼 것인가.

영화는 대홍수가 빚어낸 재난 상황이라는 타임 루프 속에 실험체 안나를 가둔다. 자인을 구조할 때까지. 혹여 수천, 수만의 날짜가 흘러간다 해도. 아이를 구조하는 과정 속에서 감정 이식에 필요한 모성애를 학습시키고 이를 강화하기 위함이다. 실험체 안나에 의해 자인이 구조될 때가지 끝없이 반복되는 실험은 충분한 데이터로 축적될 것이며, 이러한 결과물은 지구 종말 이후 탄생하게 될 새로운 인류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애착이라는 정서적 유대에 목 말라한 보안 요원은 이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키워왔다.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위안을 얻을 만큼. 안나의 실험 과정에서도 그는 이를 재차 확인하고 싶어 한다. 이렇듯 어릴 적 엄마로부터 버림 받은 아픔이 트라우마가 된 보안 요원과 안나는 모성애라는 화두로 놓고 볼 때엔 서로 대척점에 선 인물이지만, 이는 안나의 재난 속 지난한 학습 과정의 힘이 결국 모성애에서 비롯된 것이며, 때문에 영화에서는 오히려 이의 가치를 더욱 부각시키는 장치로 활용된다.

실제와 비슷한 재난 상황 묘사를 위해 오랜 시간 물속에서 열연을 펼친 배우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영화 속 시점은 아마도 먼 미래의 일이 될 듯. 그러니까 구체적인 기술은 스크린 뒤의 영역으로 남겨 놓거나 관객의 상상에 맡기고, 전달하고자 하는 본질에 집중한 감독의 연출을 칭찬해 주고 싶다. 아울러 이른바 AI의 딥러닝을 타임루프 기법과 결합하여 연출한 시도는 관객의 설득력을 높이는 대목이다.
영화 <대홍수>는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기억과 감정은 오히려 더 큰 가치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우는 작품이다. 대재앙 앞에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우리. 극 중 안나의 고통이 가중될수록 모성애는 점점 더 깊어지고, 이 모성애를 통해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엿본다.
감독 김병우
* 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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