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이병헌)는 25년 동안 한 제지 회사에서 재직 중이다. 토끼 같은 아내 미리(손예진)를 만나 가정을 꾸렸고, 꿈에 그려 온 번듯한 내집도 장만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 둘, 그리고 골든리트리버 두 마리까지. 정말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완벽한 가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만수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그가 다니던 회사의 오너가 외국인으로 교체됐고, 경영 효율화라는 명분 아래 대대적인 직원 해고가 이뤄진단다. 만수도 해고자 명단에 포함됐다. 만수는 사전에 연습하고 준비한 해고 반대 이유를 바뀐 경영진 앞에서 설파하려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입을 떼자마자 제지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그와 동시에 만수에게 돌아온 한 마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오랜 기간 몸 담아 온 직장에서 해고 당한 한 남성의 이야기다. 재취업을 위해 벌이는 좌충우돌 사건을 블랙 코미디 장르에 녹여낸 작품이다. 제46회 청룡영화상에서 최우수작품상 등 7개 부문을, 그리고 제45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남우조연상 등 2개 부문을 수상하였고, 영평 10선에도 선정됐다. 토론토국제영화제, 스톡홀름영화제, 시체스영화제 등 굵직한 해외 영화제에서도 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미리는 다시 취업하면 괜찮을 것이고, 또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만수를 독려한다. 하지만 만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취업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수개월째 허탕만 거듭하던 만수. 결국 집을 부동산 사무실에 내놓고 미리는 치과 병원에 취업하는 등 본격적인 재정 긴축에 나선다. 자괴감과 미안함에 몸둘 바 모르는 만수.

자신의 가정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던 그다. 그 무렵 기발한(?) 생각 하나가 만수의 뇌리를 스친다. 제지 업계에서 잔뼈가 굵긴 했어도 자신보다 우월한 경쟁자들이 도처에 즐비한 게 현실. 이들을 제거하면 재취업의 가능성을 훨씬 높일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바로 이거야!' 만수는 쾌재를 부르며 곧바로 행동에 나선다. 취업을 원하는 회사의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에 나선 경쟁자들의 이력서를 몰래 빼돌린 만수. 제거 대상자들을 하나둘 추려 나간다. 첫 상대는 범모(이성민)였다.
이후 영화는 스릴러 장르로 돌변한다. 자신만이 재취업의 적임자라는 신념을 갖고, 경쟁자들의 숨통을 끊는 지극히 극단적인 방법이 본인과 가정을 살리는 유일한 해법임을 확신한 그는 곧바로 첫 대상자 물색에 나선 것이다. 뭐든 처음이 힘든 법. 범모를 범행 대상으로 상대할 땐 그도 머뭇거리며 주저하는 분위기가 역력했으나, 횟수가 거듭될수록 손놀림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한다. 관객의 심장 박동수도 덩달아 높아진다.

만수가 시조(차승원)를 제거하고 빗속을 질주할 때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던 노래. 다름 아닌 김창완의 <그래 걷자>였다. 기타 연주에 감미로운 목소리가 더해지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곡인데, 만수의 미치광이 같은 행위 뒤 비 내리는 거리 배경과 어우러지니 어쩐지 그로데스크하다.
가족과 가정, 특히 여자들을 지켜내려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를 내조하며 우리는 원팀임을 끝까지 외쳐 온 미리의 의리에도 박수를 쳐주고 싶다. 모르긴 해도 한 가정에 커다란 어려움이 닥쳐 온다 한들 영화처럼 만수와 미리의 그것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면 어떻게든 극복해낼 수 있지 않을까.

직장에서 해고된 만수가 느꼈을 감정을 헤아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직장인이라면, 특별히 가장이라면 어느 누구도 만수의 사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그의 감정에 쉽게 동화될 수밖에 없다. 만수와 비슷한 연령대의 직장인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직장에서 해고된 한 남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극의 내용은 더 없이 씁쓸하지만, 영화는 현실을 비트는 배우들의 과도한 몸짓과 장르의 변주를 통해 절로 웃음 짓게 만든다. 한 마디로 웃픈 영화다.

만수는 해고될 즈음 치통을 앓고 있었다. 재취업을 준비하는 과정 중에도 이 썩은 이빨은 그를 지속적으로 괴롭힌다. 만수가 아픈 이빨로 인해 인상을 찌푸릴 때마다 왠지 덩달아 답답함이 느껴졌었는데, 그가 마지막 경쟁자를 물리치면서 스스로 충치를 뽑아냄과 동시에 비로소 고통에서 해방될 때엔 묘한 카타르시스가 전달됐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만수는 결국 무리수를 통해 원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가 맞닥뜨리게 되는 건 AI로 통용되는 거대한 자동 시스템이었다. 그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 가며 어떻게든 일자리를 얻긴 했으나 이제 그가 경쟁해야 하는 건 사람이 아닌 AI 시스템. 우리의 현실인들 이와 다를까. 앓던 이를 뺐더니 또 다른 충치가.

감독 박찬욱
* 이미지 출처 :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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