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 수십 명을 태우고 북극으로 항해 중이던 덴마크 국적의 선박 한 척. 이 배는 빙하에 갇혀 오도 가도 못 하는 처지가 됐다. 선박을 에워싼 얼음 덩어리들은 견고하였으며 이를 수작업으로 일일이 제거하던 선원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점차 지쳐갔다. 선장으로부터 '회항하라'는 명령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찰나다.
선장은 완고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항해 의지를 굽힐 생각이 없었다. 그 때였다. 선박이 좌초된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 의문의 폭발 사고가 발생하고, 크게 다친 한 남성이 발견된다. 빅터(오스카 아이삭)였다. 그는 선장의 명령에 따라 급히 선실로 옮겨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 형상의 괴생명체(제이콥 엘로디)가 득달같이 달려들더니 선원 수 명을 일거에 내동댕이친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괴생명체는 방금 구조된 빅터를 자신에게 내놓으라며 선장과 선원들을 향해 으름장을 놓는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 괴생명체를 창조해낸 의사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그 피조물에 관한 이야기다.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방법을 알아낸 물리학자가 마침내 시체를 이용해 생명체를 창조해내고, 괴력을 발휘하는 그 생명체가 추악한 자신을 창조해낸 창조주를 향한 증오심에 복수를 꾀한다는 내용의 메리 셸리가 쓴 동명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원작이다.
괴생명체는 강했다. 총기 따위도 소용 없었다. 오히려 완력을 앞세운 괴생명체의 무차별 공격 앞에서 선원들은 속수무책으로 스러져 갔다. 그 순간 발휘되는 선장의 기지. 괴생명체는 부서진 빙하 틈 사이로 속절없이 빨려들고 만다. 괴생명체가 눈 앞에서 사라지자 빅터는 비로소 자신의 사연을 선장에게 풀어놓기 시작한다.

풍족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빅터. 하지만 그의 삶은 평탄치 않은 듯했다. 외과의사인 아버지의 영향력 탓이다. 엄격한 그의 양육 방식은 어린 빅터를 옥좼다. 그나마 어머니가 숨구멍 역할을 하였으나 그녀는 빅터의 동생을 낳던 도중 세상을 뜨고 만다. 빅터의 삶은 크게 요동친다. 모호하기 짝이 없던 죽음이라는 존재가 손에 잡힐듯 실체로 다가온 까닭이다. 이후 빅터는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영생의 생명체에 매달리게 되고, 실제로 이를 창조해내는 데 모든 열정을 쏟아붓는다.
영화는 3부로 나뉜다. 1부는 현재 시점, 그리고 2, 3부는 각기 과거 시점이다. 프랑켄슈타인에게 쫓기는 빅터와 그를 돕는 선장 이야기는 1부, 빅터의 성장 및 프랑켄슈타인의 창조 과정과 그 뒷 이야기는 2부, 그리고 마지막 3부는 프랑켄슈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상, 창조주 빅터와 피조물 프랑켄슈타인 사이의 갈등을 그린다.

결코 죽지 않는 생명체를 만들기 위한 빅터의 욕망은 집요하였으며 필사적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조롱과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중단될 뻔한 위기도 수차례 넘겼다. 하인리히(크리스토프 왈츠)라는 든든한 조력자 덕분에 그의 연구는 날개를 단다. 그의 실험엔 전쟁 중 숨진 이들의 시신이 활용됐다. 이런 저런 방식으로 짜깁기되고 꿰어 맞춰진 신체의 각 부위들. 마지막 퍼즐 조각 하나만이 남게 되는데, 다름아닌 생명력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영생의 피조물은 이렇듯 지난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전 과정은 빅터 자신의 전부를 갈아 넣는, 일종의 폭주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빅터를 이렇듯 폭주 기관차로 만든 것일까.

그의 성장 과정을 들여다보자. 아들의 삶에 자기 자신을 투영시키려던 엄한 아버지, 그의 뒤틀린 욕망에 빅터는 정체성 혼란을 겪어왔다. 어머니마저 이른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고, 자신의 일부가 소멸돼 가는 현실에 눈을 뜬 어린 빅터. 때문에 절대로 죽지 않는 생명체의 창조라는 다소 엉뚱한 발상은, 어쩌면 빅터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방어기제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빅터 동생의 연인이자 아내가 될 여인 엘리자베스(미아 고스)는 빅터의 후원자 하인리히의 조카다. 그녀는 빅터의 주변을 배회하며 그의 마음을 훔쳐가지만, 그가 범접하기엔 지나치게 고결한 영혼의 소유자다. 영화에서는 외과의사였던 아버지의 욕망이 아들 빅터에게 대물림되고, 빅터 자신은 내면에 감춰진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 채 영생의 생명체 창조라는 양태로 이를 표출시킨다. 순수한 영혼 엘리자베스는 이러한 빅터의 탐욕을 적나라하게 부각시키는 존재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빅터는 새로운 생명체의 고안에만 모든 열정을 쏟아붓는다. 그 이후는 없었다. 생명 윤리라는 가치관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준 것이다. 조물주로서의 책임감은 어디로 간 걸까. 그렇다면 인간을 창조한 조물주는 다를까. 빅터와 달리 창조 이후를 고려하긴 한 걸까.
프랑켄슈타인의 조물주 빅터와 인간의 조물주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점 하나가 있다. 빅터는 애초 영생을 꿈꾸며 그에 맞춰 프랑켄슈타인을 프로그래밍했다.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 하는 스스로를 혐오하고 저주한다. 빅터와의 갈등이 싹 튼 결정적인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일정 수준의 수명 연장이 가능할지는 몰라도 누구든 생로병사를 피해갈 수는 없다. 수명을 관장하는 유전자 속 염색체인 텔레미어는 시간이 갈수록 짧아져 결국 육신과 더불어 소멸해 가기 때문이다.

영생을 꿈꾸고 희망하는 건 비단 영화 속 빅터만이 아닐 테다.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사람들의 로망이다. 하지만 불로장생, 더 나아가 영생이 과연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해줄까? 태어난 이상 늙고, 늙으면 병이 들고, 병이 들면 소멸해 가는 건 자연의 이치이자 조물주가 프로그래밍한 결과물이다. 그 과정에서 고통이 수반되는 건 필연이다. 삶의 디폴트 값은 고통이며, 행복을 누리는 시간은 생각만큼 길지 않다. 이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작은 행복을 만들고 찾아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통을 영원히 끊어낼 수 있는 건 오직 죽음뿐.
영화 속 프랑켄슈타인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죽기를 간절히 바라나 안타깝게도 죽을 수가 없다. 그에 반해 인간은 길면 100년 남짓 생을 누리다 소멸해 간다. 인간에게 무제한의 자원과 시간이 주어진다면 삶이 지금처럼 소중할까? 우리의 삶이 유한하기에 더욱 가치있는 게 아닐까.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다루는 일엔 각별한 생명 윤리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유한한 삶이 우리에겐 불행이 아니라 굉장한 축복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우는 작품이다. 아주 간만에 만난 수작이라 감독이 누구인지 궁금하였는데, 기예르모 델 토로였다니. 역시 거장답다.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 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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