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모름지기 식구란.. 영화 '남매의 여름밤'

새 날 2022. 2. 27.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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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변두리에서 살아가던 아빠(양홍주)와 옥주(최정운), 동주(박승준) 남매가 이사를 가게 된 건 어느 여름날의 일이다. 이들의 목적지는 서울 근교에 위치한 할아버지(김상동)의 집이었다. 경승합차 다마스에 짐을 모두 싣고 세 사람이 탈 수 있을 정도로 이삿짐은 아주 단촐했다. 웬만한 것들은 모두 버리고 온 덕분이다.

 

할아버지의 건강 상태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단순히 걷거나 말하기만으로도 힘겨워했다. 아빠는 아이들의 여름방학 기간 동안만 이곳에서 머물 것이라고 했다. 며칠 뒤 아이들의 고모(박현영)가 할아버지의 집을 찾는다. 남편과 갈등이 빚어져 한동안 이곳에 머물겠단다. 세 식구, 그리고 고모의 합류까지. 그동안 할아버지 혼자 쓸쓸히 지내오던 넓은 2층 양옥집은 이들로 인해 모처럼 복닥거리며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사업에 실패하고 남편과의 불화로 할아버지의 집에 얹혀 살게 된 어느 가족의 이야기다. 3대가 한 집에 살면서 겪게 되는 희노애락을 보편적인 삶의 시선으로 카메라에 담아냈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 등 4관왕을, 그리고 제49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밝은미래상 등 국내외 영화제에서의 잇따른 수상과 호평을 이끌어낸 작품이다.

 

 

할아버지의 집은 근래엔 보기 드문 형태다. 마당을 갖춘 2층 단독주택이다. 목재로 꾸며진 내부는 주택이 지어진 시기를 가늠케 한다. 꽤 오래됐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보물 1호일지도 모르는 안방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자개장, 거실 벽면의 흑백사진, 빛바랜 달마 그림 액자, 누군가 입춘대길을 바라며 붙였을 입춘방, 손때 묻은 오래된 선풍기, 여러 단으로 구성된 오디오 시스템으로부터는 할아버지와 함께해온 짧지 않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아빠는 사업에 실패했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하여 따로 살고 있었다. 아빠는 길 위에서 가품 신발을 팔고 있는 처지이지만, 미래를 위해 자격증을 준비 중일 만큼 어느 누구보다 삶에 충실한 사람이다. 편찮은 할아버지를 극진히 보살피는 아빠는 아이들에게도 엄마의 공백을 느끼지 않도록 애를 쓰는 모습이다. 고모는 고모부와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다. 고모가 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밤 늦게 고모부가 찾아오지만 고모는 그를 차갑게 외면한다.

 

 

영주는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남친이 있으나 늘 일방적인 관계인 것 같아 불만이 많고 불안했다. 요즘엔 외모에 부쩍 관심이 높아져 쌍꺼풀 없는 자신의 눈이 고민스러웠다. 아빠한테 쌍커풀 수술비를 빌려달라고 부탁해보지만, 콧방귀도 안 뀐다. 영주는 홧김에 일을 저지른다. 아빠가 판매하는 신발 하나를 훔쳐 직거래를 시도하다가 경찰서에 다녀온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빠가 판매하는 신발이 가품인지 짐작조차 못 했던 영주. 이를 어쩌나. 앞서 남친에게도 신발 하나를 선물했는데 말이다.

 

 

영주는 사실 할아버지를 잘 모른다. 할아버지를 직접 뵌 건 수 년 만이다. 가뜩이나 편찮으셔서 거동을 잘 하지 못 하고 말수도 부족한 상황. 그럼에도 영주는 할아버지를 이해하려 애썼다. 할아버지가 즐겨 듣는 노래 '미련'은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 영주의 달팽이관을 자극하며, 세대를 훌쩍 뛰어넘어 두 사람을 끈끈하게 이어준다. 생신 때 선물로 사다드린 중절모는 할아버지의 최애 아이템으로 등극하고, 마당에서 정성껏 키운 토마토를 할아버지는 손수 따다 손녀의 손에 꼭 쥐어준다. 두 사람은 특별한 대화 없이도 이렇듯 눈빛만으로 서로의 감정을 읽고 헤아렸다. 영주에게는 특별한 경험이다.

 

 

영주는 어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빠와 고모가 못마땅했다. 조금 편찮으시긴 해도 멀쩡히 살아계신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낼 계획을 세우고, 또 할아버지의 집을 처분할 생각에 골몰하고 있으니 말이다. 할아버지 몰래 벌이는 계획이라 더욱 괘씸했다. 동생 동주가 따로 사는 엄마를 만났다고 자랑하는 것도 꼴 보기 싫었다. 자존심조차 없는 동생이 한심스러웠다. 그랬던 영주의 꿈속에 느닷없이 엄마가 등장한다. 영주가 어른들만의 사정을 조금 헤아릴 수 있게 됐다는 신호일까.

 

 

아빠와 고모는 남매 사이임에도 얼굴을 맞댄 지 오래됐다. 사는 게 바쁘다 보니 명절이나 친인척 경조사 때 가끔 얼굴을 비칠 뿐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했다. 할아버지와의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붙이임에도 먹고 사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서로를 외면해왔다. 현대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들 가족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무척 씁쓸한 대목이다.

 

 

영화에서는 3대가 함께 모여 식사를 하거나 음식을 나누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먹는 일을 빼놓고 삶을 이야기할 수 없듯이 핵가족화, 더 나아가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점차 그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식구에 대한 감독의 애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들인 식구. 모름지기 식구란 함께 모여 먹고 마시고 기뻐하며 노여워하거나 슬퍼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영주와 동주 남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아빠와 고모 남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핵가족과 1인 가구가 지배적인 시대에 3대가 모여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는 색다르게 다가온다. 사춘기를 관통 중인 영주에겐 이러한 경험이 더 크게 작용한다. 비록 짧은 시기에 불과하지만, 3대가 한데 모여 지지고 볶으며 삶의 다양한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는 건 삶에 유용한 지침이 되게 해줄 뿐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자양분이 되게 해줄 것이다. 

 

 

감독  윤단비   

 

* 이미지 출처 : 그린나래미디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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