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미래가 없는 세상이란.. 영화 '아주 작고 완벽한 것들의 지도'

새 날 2022. 2. 24.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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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지축 어느 방향으로 튀어오를지 예단하기 어려운 10대 소년 마크(카일 앨런). 그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시간 감옥이란 곳에 갇힌 뒤였다. 이른바 타임 루프라 불리는 늪에 빠진 것이다. 눈을 뜰 때마다 그가 마주해야 하는 건 매일 똑같은 형태의 하루였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16시간이 지나면 또 다시 같은 하루를 맞이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 아침마다 자신의 침대 위에서 눈을 뜨자마자 그에게 여지 없이 들려오는 건 엄마의 승용차 크락션 소리였다.  

 

반복되는 하루, 똑같은 상황과 사건의 연속. 이는 한창 혈기왕성한 10대 소년의 취향에는 전혀 어울릴 법하지 않은 현실이다. 10대 소년에게 일정한 루틴을 반복해야 하는 것처럼 지루한 일은 없다. 단조로움이라는 단어와는 그다지 친숙하지 않았던 마크. 그는 창의력을 발휘, 관심과 활동 영역을 점차 넓혀나가기 시작한다. 그림 그리기 재능을 살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물과 사건들을 그가 구축한 그림 세계에 차곡차곡 채워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처럼 타임 루프에 갇힌 소녀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마크. 마거릿(캐스린 뉴튼)이었다. 그녀는 과학적 재능이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특별히 4차원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세상에 대한 관심도 많았다. 두 사람은 시간 감옥에 갇혔음에도 동병상련 따위의 감정은 애초에 없었다. 그맘때 연령대라면 으레 그러하듯이 자신 만만했다. 세상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을 제외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시간 감옥에 갇힌 것으로 간주했다. 마음껏 일탈을 벌여도 다음날이면 아무도 기억 못하는 놀라운 세상. 두 사람은 미래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이 시간 감옥이 빚어낼 법한 모든 즐거움을 최대한 만끽한다.

 

영화 <아주 작고 완벽한 것들의 지도>는 타임 루프에 갇힌 10대 소년과 소녀가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시간 감옥에 갇혀 미래를 담보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서로 다른 처지에 놓인 상대를 이해하고 잠시 길을 잃었던 삶의 방향을 올바른 궤도로 되돌려 놓게 된다. '레브 그로스먼'의 동명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마크는 나름 이타적이다. 하루를 반복하게 되는 타임 루프로부터 세상 사람들을 당장 놓아주고 싶어 한다. 자신이 빠져나와야 되는 상황을 거꾸로 자신 외의 사람이 빠져나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착각이자 허세였다. 그에겐 미래가 없는 삶은 희망이 없어 보였다. 책을 출간하기 위해 준비하는 아빠가 책을 온전히 낼 수 있고, 축구경기에서 3:0으로 진 동생이 다음 경기에서는 반드시 이길 수 있도록 시간 감옥에서 당장이라도 빠져 나오고 싶었다. 미래를 되찾고 싶었다.

 

반대로 마거릿은 시간 감옥에서 그냥 이대로 머무르고 싶어 한다. 미래는 사전 속에나 존재해야 하고 현실에서는 더 이상 없었으면 한다. 시간이 흐르지 않으면 무언가 잘못돼 삐걱거리는 세상이 올바르게 변화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이상기후 현상도 더 이상 일어날 일 없으며, 반복되는 시간을 이용해 암을 정복하면 암으로 고통 받는 이들도 왠지 없을 것 같았다. 마거릿 개인적으로는 내일 당장 대장 내시경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대됐다. 

 

 

한 사람은 시간 감옥에서 당장 탈출하고 싶어 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남고 싶어 하는 완벽하게 엇갈린 상황, 미래에 대한 관점이 뚜렷하게 달랐던 두 사람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시간이 작동하는 원리에 무언가 오류가 발생하면서 자신들이 무한 루프에 갇혔다고 생각하는 마크와 마거릿은 시간변경선 통과가 이를 해결해줄 단초라고 판단하지만 일단 이는 정답이 아닌 걸로. 

 

마크가 매일 반복되는 루틴에 지루함을 느끼는 바람에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차곡차곡 그림으로 채워넣어 결국 시간 감옥으로부터 탈출하게 될 패턴을 찾아냈듯이, 한 사람의 삶은 보잘 것 없는 것들과 허투루 보내지는 시간들이 얼기설기 축조되어 결국 완벽한 형태를 갖춰간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삶은 누구의 것이 됐든 그 형태가 모호할 수밖에 없다. 앞날이 창창한 10대들의 그것은 더욱 엉성하다.

 

 

미래에 대한 이해관계가 전혀 달랐던 두 사람은 상대의 다른 처지를 이해하면서 다가오는 미래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일단 시간 감옥에서 탈출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영화 <아주 작고 완벽한 것들의 지도>는 시간 감옥에 갇힌 10대 남녀가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체험하면서 자신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삶의 가치를 새삼 깨닫게 된다는 판타지다. 타임 루프라는 영화의 단골 소재에 시종일관 경쾌한 분위기를 얹어 가벼움 일색이지만,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삶을 대하는 태도는 꽤나 진지하다. 

 

 

감독  이안 사무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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