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삶..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새 날 2022. 2. 23.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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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겸 연출가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와 극작가로 활동 중인 그의 아내 오토(키리시마 레이카)가 살아가는 방식은 여느 부부와 다름없다. 밖에서는 일에 몰두하고 가정에 복귀하면 사랑을 나누는 등, 서로를 향한 애정이 남다르다는 점을 빼고선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가후쿠는 업무차 출장길에 나선다. 하지만 악화된 기상 탓에 일정이 변경되어 급히 발걸음을 돌리게 되는 가후쿠. 그가 집에 도착하자 이러한 사정을 알 리 없는 아내가 때마침 어떤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내의 외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가후쿠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인다. 하지만 사건 당시에는 물론, 이후에도 이를 전혀 내색하지 않는 그다. 가후쿠는 평소와 다름 없이 일하고 또 사랑을 나눈다. 늘 그래왔듯이 겉으로는 지극히 평온해 보이는 가정이다. 사건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오토는 변함 없이 출근길에 나서는 가후쿠에게 퇴근 후 특별히 할 말이 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는 오토의 생전 마지막 말이 된다. 퇴근 후 그가 집에 도착했을 당시 그녀는 이미 숨져 있었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과거의 상처를 각기 안고 살아가는 남녀의 이야기다. 두 사람은 업무 관계로 인연을 맺게 된 뒤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 보고 이를 보듬으며 다시금 살아갈 힘을 얻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아내가 숨진 지 2년이 지났다. 히로시마에서 개최되는 연극 행사에 초청된 가후쿠. 그는 자신의 거주지를 벗어나 두 달 동안 이곳에서 머물러야 한다. 주최 측에서 임시 숙소를 정해 주었다. 그는 숙소에서 업무 공간까지 15년 간 애지중지 관리해온 자신의 차로 직접 운전하며 이동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주최 측은 안전상의 이유로 임시 운전기사 미사키(미우라 토코)를 그에게 배속시킨다.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일단 운전대를 미사키에게 넘기는 가후쿠. 그의 안전 운송은 이제 미사키의 몫이 된다.

 

 

미사키의 놀라운 운전 솜씨는 까다로운 가후쿠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가후쿠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있었다. 덕분에 가후쿠의 긴장도 스르르 풀린다. 오래된 습관이었던 자동차 안에서의 대사 연습도 다시 시작하게 된다.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건 인지상정. 상대의 과거를 알아갈수록, 그리고 속을 들춰낼수록 어쩐지 다른 듯 닮은 듯한 두 사람. 각자의 감정에 작은 파장이 생기는 순간을 포착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극중 가후쿠는 누구보다 아내를 사랑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와 오토 사이에는 원래 딸이 하나 있었다. 아이는 4살 때 폐렴으로 사망했다. 오토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다. 이를 극복하는 데는 오랜 시일이 소요된다. 그녀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잡은 의문의 소용돌이는 이로부터 기인하는 듯하다. 가후쿠가 그녀를 좀 더 이해하기 어려웠던 원인으로 짐작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내의 불륜 상대였던 배우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와 가후쿠의 인연은 몹시 질기다. 그는 가후쿠가 연출하는 이번 히로시마 연극제의 작품에도 배우로 참여하게 된다. 오토와의 인연을 매개로 가후쿠의 주변을 끝없이 맴도는 다카츠키. 가후쿠로서는 그런 그가 몹시 불쾌하고 불편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그 덕분에 오토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파악하게 되는 결과와 결이 비슷하다고 할까.

 

 

극중 가후쿠와 미사키가 각기 안고 있는 상처와 죄책감은 비록 그 종류와 크기가 다를지언정 삶을 짓눌러온 무게감은 엇비슷하다. 딸과 아내를 잃은 가후쿠, 그리고 어릴적 학대를 경험하고 어머니를 잃은 미사키. 두 사람은 과거에 갇혀 한 발자욱도 움직이지 못 했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책망했다. 그럼에도 죄책감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살아온 환경이 전혀 달랐던 두 사람. 멀찍이 떨어져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서로를 응시했던 건 아직 경계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겠지만 그보다는 앞서의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가후쿠가 애지중지 관리해온 SAAB를 매개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다. 상대가 입은 상처의 깊이를 헤아리면서 둘은 서서히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매번 뒷좌석에 앉아있던 가후쿠가 어느 순간 조수석으로 옮겨 앉아 미사키와 함께 담배룰 피우는 장면은 마침내 두 사람의 감정이 좁혀진 거리 이상으로 가까워졌다는 걸 의미한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완전히 좁혀질 즈음, 가후쿠와 미사키는 다시금 삶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극이 막바지에 이르면 배우 박유림이 극중 이유나 배역을 맡아 수어로 대화하는 신이 등장한다. 이번 작품의 백미로 꼽히는 장면이다.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라고 그녀가 손을 내밀며 호소해올 땐 숨소리마저도 방해가 될 만큼 관객을 몰입시킨다. 백 마디 말보다 손짓의 변화 하나가 더욱 따듯하고 의미 깊게 다가올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주는 장면이다. 무려 3시간에 이르는 긴 러닝타임의 대미는 이렇듯 감동적으로 마무리 짓게 된다.

 

삶은 고통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다. 우리 모두는 각기 크고 작은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간다. 비록 고통스럽고, 괴롭고, 힘들더라도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게 바로 삶이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숨진 딸과 아내에 대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남성이 또 다른 과거의 상처를 지닌 채 살아가는 여성을 만나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고 삶에 대한 의지를 복원해 나가는 이야기다. 위로를 건네고, 용기를 북돋우며, 복원력을 키워주는 작품이다.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 이미지 출처 : (주)트리플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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