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강물 빛과 체념의 빛.. 영화 '비가 그친 후'

새 날 2022. 2. 22. 16:15
반응형

대학원에서 연구 조교로 근무 중인 유키스케(나가노 타이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연구실로 매일 오가는 길에 위치한 붕어빵 집을 방문하는 게 그에겐 하루의 일과다. 무엇보다 이 집의 붕어빵은 맛이 매우 빼어났다. 만드는 이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가 이곳을 벗어나지 못 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붕어빵 집 주인장 때문이었다.

 

코요미(에토 미사)라 불리는 아가씨였는데, 밝고 친절한 그녀의 매력에 유키스케는 저도 모르게 빠져들고 만다. 그녀가 쉬는 날이면 맛있는 붕어빵을 먹지 못 한다는 아쉬움보다는 그녀를 볼 수 없다는 허전한 감정이 더 크게 밀려왔다. 코요미 역시 자신이 정성껏 만든 붕어빵을 매일 구입하여 맛있게 먹어주는 청년 유키스케가 싫지는 않은 듯했다. 두 사람의 이해관계는 이렇게 맞아 떨어진다. 둘은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며 서로를 향한 감정을 키워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코요미가 사고로 머리를 다쳐 응급실로 실려가게 된다. 

 

 

영화 <비가 그친 후>는 대학원에 다니는 한 청년과 사고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극적인 사건 전개나 인물들의 큰 감정 기복 없이 시종일관 극을 차분하게 이끌어 나가는 감독의 연출력과 담백한 영상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병상에 누워있던 코요미는 사고의 여파로 한동안 깨어나지 못 한다. 2주가 지난 뒤에야 의식이 돌아온 코요미. 그녀는 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된다. 그녀에게 발현된 증상은 사고 당시까지의 기억은 남아 있으되 이후의 기억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증발하는 형태였다. 누군가가 돕지 않으면 삶을 지탱하기 어렵게 된 코요미. 유키스케는 그런 그녀를 위해 자신의 집에 머물도록 배려한다.

 

 

극 중 유키스케는 장애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한쪽 다리가 불편하여 온전히 걷기 어려웠다. 그가 매일 다리를 질질 끌며 오갔던 길은 비장애인들에겐 대수롭지 않을 정도로 짧은 거리일지 모르나 그에게는 사실 고행길이었다. 사고 후유증을 겪는 코요미가 각별하게 다가오고 그녀를 배려해줄 수 있었던 데엔 이러한 그만의 특별한 사정이 있었던 덕분이다. 유키스케는 코요미에게 조금 더 적극적이지 못 했던 점을 못내 아쉬워한다. 돌이켜 보면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녀를 자신 있게 소개하지 못 했다. 그녀와의 관계는 늘 어정쩡했다. 

 

코요미에게 사고가 발생한 날 밤은 조금 특별했다. 보름달이 밝게 뜬 하늘에서 굵은 장대비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사고 순간까지의 기억만을 간직하는 그녀에겐 장대비가 쏟아지던 그날 밤의 상황이 그녀의 머릿속에 저장된 기억의 마지막 장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낯선 집에 와있음을 깨닫게 되는 코요미가 유키스케에게 쏟아내는 질문들은 대체로 이러했다.

 

 

"여기가 유키스케의 집?"

"비가 그쳤나 봐?"

 

유키스케는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때마다 기억이 되돌아가는 그녀를 위해 사고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설명해준다. 코요미와 유키스케가 하루를 여는 루틴은 이렇듯 고정돼 있었다. 비록 다음 날이 되면 코요미의 전날 기억이 모두 사라져 매일 자초지종을 다시 설명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했지만, 유키스케는 코요미와 함께하는 시간이 마냥 즐거웠다.

 

매일 계란 하나를 부치다가 이제는 한 쌍을 준비하는 일이 그에겐 행복했다. 함께 커피를 끓여 마시거나 고구마를 구워 먹고, 비록 싫어하는 브루콜린이었지만 그녀가 직접 조리하여 나눠 먹는 이 모든 과정이 그에겐 꿈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극복하기 어려운 게 있었다. 유키스케가 아무리 노력해도 코요미는 사고 이후의 그를 기억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코요미가 과거 교제했던 연인에 대한 기억은 또렷한 데 반해 자신과의 관계는 더 이상의 진척이 어려운 현실에 자괴감을 느끼고 자기 연민에 빠져드는 건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영화 <비가 그친 후>는 한쪽 눈은 강물 빛을 닮았고 또 다른 한쪽 눈은 체념의 빛을 띤 한 남성, 비록 완벽하지 못해 천천히 나아가지만 자기만의 세계를 뚜렷하게 축조한 이 청년이 사고로 머리를 다쳐 온전하게 기억할 수 없게 된 여성이 쌓아놓은 또 다른 세계를 함께 더해 비로소 온전한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맑고 투명한 영상과 서사는 혼탁해진 마음을 깨끗이 정화시켜준다. 두 청춘 남녀의 짧은 여정과 함께해온 피아노 선율은 극의 변곡점마다 관객의 감정에 악센트를 가한다. 

 

그녀에게 사고가 발생하기 얼마 전의 일이다. 코요미는 유키스케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다람쥐를 키웠는데, 호두를 주었더니 방안 이곳저곳에 이를 숨겨두었다"고. 그리고 "다람쥐가 죽은 뒤 숨겨두었던 호두가 하나둘 나타날 때마다 너무 슬펐다"고. 유키스케는 안도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그녀가 사고 당하기 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감독  나카가와 류타로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