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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엄혹한 현실 버텨낸 소녀.. 영화 '책도둑'

새 날 2022. 2. 17.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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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2월, 동생과 함께 기차를 이용하여 입양길에 오른 리젤(소피 넬리스). 이동 도중 동생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그녀는 홀로 한스(제프리 러쉬)와 로사(에밀리 왓슨) 부부 가정에 입양된다. 외톨이가 된 리젤에겐 낯선 환경과 마주하는 현실이 녹록지 않아 보인다. 특별히 양부모와의 관계가 염려스러웠다. 다정다감한 한스와는 달리 양어머니 로사는 까칠하기 짝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녀는 늘 불만과 짜증 섞인 말투로 리젤을 다그치기 일쑤였다.

 

리젤은 글자를 미처 익히지 못했던 까닭에 학교 생활마저 힘겨웠다. 또래들이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바보라 놀리며 못살게 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의 편이 되어준 친구가 있었던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루디(니코 리에르쉬)가 바로 그 친구였다. 루디는 리젤이 양부모에게 입양 오던 당일부터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던 친구다. 달리기를 유난히 좋아했던 그는 늘 리젤의 곁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우정을 지켜 나간다.

 

 

영화 <책도둑>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독일의 한 가정에 입양된 소녀의 이야기다. 나치 정권의 철권 통치와 전쟁 광풍이 자아낸 비극적 상황을 소녀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이야기를 통해 극복해 나간다. 호주의 작가 '마커스 주삭'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리젤은 호기심 많은 소녀였다. 그 중에서도 활자에 대한 관심이 유독 컸다. 한스는 그런 그녀에게 글자를 가르치며 함께 책을 읽어나간다. 영특했던 리젤은 글자를 익히는 속도도 남달랐다. 그 무렵 학교에서는 나치 정권을 찬양하는 합창이 울려퍼졌고, 거리에서는 이른바 불온서적들이 불태워졌다. 나치 정권은 폭주하였으며, 그로 인해 전쟁 분위기가 한층 고조돼갔다. 덩달아 공산주의자와 유대인을 향한 핍박도 거칠어져갔다.

 

리젤은 로사의 지시에 따라 시장의 집에 빨랫감을 전달해주는 심부름을 하곤 했는데, 시장 부인은 그런 그녀에게 책을 읽고 싶으면 언제든 자신의 집을 방문해도 좋다고 허락한다. 이후 시장의 집은 리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창구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다. 

 

 

한편 유대인이었던 한스의 옛 은인의 아들 막스(밴 슈네처)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한스의 집으로 들이닥친다. 수용소로 끌려갈 처지로 내몰리자 막스의 부모가 한스에게 아들을 맡긴 것이다. 한스는 막스를 지하실에 숨긴 뒤 정성껏 보살핀다. 덕분에 리젤은 집에 머무는 대부분의 시간을 막스와 함께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막스에게 바깥 세상 풍경을 자신만의 색깔로 설명해주고, 막스는 리젤의 지적 갈증을 해소해주며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간다.

 

극 중 리젤이 나치 치하와 세계대전이라는 엄혹한 시대를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책과 글 덕분이었다. 나치의 공포 정치는 평범한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전쟁은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책과 글은 이러한 분노를 삭이게 하거나 상실감을 치유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리젤은 책을 통해 이야기가 사람의 마음을 헤집고, 동시에 상처를 아물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후 리젤은 단순히 책을 읽는 행위로부터 한 단계 더 나아가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녀의 글은 이야기로 승화되어 전쟁의 참화 속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이들에게 잔잔한 위안으로 다가오게 한다.

 

 

영화는 인간의 죽음을 관장하는 이른바 '죽음의 신'을 화자로 내세운다. 죽음이 쏟아져내린다는 표현이 무엇보다 어울릴 법한 제2차 세계대전의 한복판, 죽음의 신이 극의 화자로 활용된 데엔 아마도 이러한 시간적 배경이 고려되지 않았을까.

 

동생의 무덤에서, 불온서적 화형식에서, 그리고 시장의 집에 몰래 들어가 빌려온 책으로 인해 '책도둑'이라는 영화 제목이 탄생했을 듯싶지만, 정작 리젤은 책과 글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고 위안을 주는 까닭에 책도둑이라기보다는 '마음도둑'이라는 표현이 더 걸맞을 것 같다. 이러한 리젤의 능력은 까칠하기 짝이 없던 로사의 마음마저 사르르 녹인다. 겉으로는 차가웠던 로사. 리젤을 향한 그녀의 속마음은 사실 어느 누구보다 따뜻했다.

 

 

전쟁은 많은 것들을 앗아간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소시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소중한 가족과 이웃들을 잃게 하는 주범이다. 수많은 생과 사의 갈림길. 그 중에서도 리젤의 이야기는 엄혹한 시대를 관통해온 사람들 가운데 단연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온다. 극 중 죽음의 신이 수많은 죽음 가운데 특별히 리젤에게 관심을 가졌던 이유 역시 비슷한 맥락이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서로 맞닿아있다. 전쟁은 누군가의 삶과 죽음의 운명을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한순간에 뒤바뀌놓기도 한다. 그만큼 끔찍하다. 이 참혹한 현실 앞에서 책과 글을 통해 분노를 삭이고 상처를 치유하며 묵묵히 삶을 지탱해온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는 시간을 거슬러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감독  브라이언 퍼시벌  

 

* 이미지 출처 : 20세기폭스코리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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