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엄마와 아빠 중 한 사람을 택해야 한다면.. 영화 '흩어진 밤'

새 날 2022. 2. 8.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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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 소녀 수민(문승아)이네 가정은 요즘 분위기가 영 좋지 않다. 뒤숭숭하다. 별거 중인 엄마(김채원)와 아빠(임호준)가 아예 이혼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최근에는 집을 보겠다며 찾아오는 낯선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집을 처분하기 위해 부동산에 내놓은 까닭이다. 별거 중인 아빠는 일주일에 한 차례 가족을 만난다. 물론 이마저도 잘 지켜지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요즘 수민이의 최고 관심사는 간식도, 드론도 아니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게 될 경우 자신과 오빠(최준우)의 거취 문제가 가장 궁금하다. 부모님의 말씀대로라면 총 3가지 경우의 수가 발생한다. 엄마가 자신과 오빠를 모두 양육하는 경우가 하나 있겠고, 엄마와 아빠가 자신과 오빠를 각각 한 명씩 맡아 양육하는 경우가 그 나머지다. 즉, 엄마와 수민, 아빠와 오빠의 조합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엄마와 오빠, 아빠와 수민의 조합이 되는 경우이다.

 

 

영화 <흩어진 밤>은 부모가 이혼을 결정하면서 혼란을 겪게 되는 한 아이에 관한 이야기다. 부모의 이혼으로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선택을 강요 받는, 이해하기 어렵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아이의 눈높이로 차분하게 담아낸다. 영화는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 대상과 배우상을 수상했다. 

 

태어나면서부터 한 집에 쭉 살았던 수민이에게는 집과 관련한 모든 것들이 추억이다. 집이 처분된다는 건 곧 수민이의 추억도 함께 사라진다는 의미. 부모님의 이혼은 그동안 함께 살았던 사람들과의 헤어짐뿐 아니라 손때 묻은 공간과 작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9살 소녀가 홀로 감당해내기엔 벅찬 현실이다. 

 

 

수민이네는 맞벌이 가정이다. 아빠는 박물관 학예사로 근무 중이고, 엄마는 학원 강사다. 학원 강사는 직업 특성상 퇴근이 늦고 주말을 반납해야 하는 경우가 잦다. 수민이는 이러한 이유로 엄마보다는 주로 오빠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다. 부부 관계가 어긋나고 틀어질수록 자신의 일이 좋다며 더욱 몰두하려드는 엄마, 이를 탐탁지 않아 하는 아빠. 좀처럼 관계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서 수민의 고민은 깊어진다. 

 

 

수민은 엄마와 아빠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면 누구를 골라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엄마든 아빠든 오빠든 자신에겐 모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토록 소중한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내 편 네 편으로 가른다는 건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수민이는 여러 경우의 수 가운데 오빠와 떨어져 살게 될 경우를 먼저 떠올려본다.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혹여 둘의 관계가 멀어져 서먹해지지는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스럽다.

 

오빠는 수민이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은 까닭인지 나름 계산이 빠른 편이다. 수민이와는 달리 제 살 길을 궁리해 놓은 듯하다. 특목고 진학을 꿈꿔온 오빠는 학원 강사인 엄마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다. 엄마와 오빠의 조합이 다른 경우보다 가능성이 월등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수민은 가족이 헤어지지 않고 예전처럼 함께 살기를 바랐다. 엄마가 아빠와 왜 결혼했는지, 그리고 아빠는 또 엄마와 왜 결혼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이를 알 수 있다면 과거처럼 서로 좋은 감정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민은 예전의 사진첩을 뒤지다가 엄마와 아빠가 주고 받은 편지를 우연히 발견하고 이를 두 사람에게 슬쩍 건넨다. 그러나 수민의 의도와는 달리 엄마와 아빠는 도통 감정 따위란 없는 사람들 같았다. 되레 핀잔만 돌아온다. 한때 좋아했으니 결혼도 했을 텐데, 그렇다면 당시의 그 감정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의미인가. 수민은 엄마와 아빠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건지 의아하면서도 답답했다.

 

현재 수민은 자신의 처지가 한 곳에 머물지 못 해 자꾸만 떠돌아 다녀야 하는 구석기 시대의 조상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정착 생활을 시작한 신석기 시대의 조상들을 난생 처음 부러워하게 된 수민, 언젠가부터 장애물 없이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드론의 비행 장면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린다. 수민이의 심정은 자유롭게 활공하는 드론을 닮고 싶었던 게 아닐까.

 

 

현실을 올바르게 설명해주지 않고 그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라는 말로 대충 얼버무리는 어른들.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상대에게 책임을 떠넘기거나 심지어 아이들에게까지 책임을 전가시키는 어른들. 한 가정의 해체는 결국 어른들 때문에 벌어진 일임에도 또 다시 아이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어른들. 자식에게 문제점이 발견될 때마다 자신이 아닌 상대를 닮아 그렇다며 악다구니를 쓰는 어른들.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고, 또 아이들에게까지 거짓말을 종용하는 어른들.

 

 

수민이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어른들의 모습은 죄다 이런 식이었다. 엄마, 아빠, 수민 그리고 오빠까지, 이렇게 네 사람이 가족을 이루게 된 데엔 수민에게 어떠한 선택권도 주어진 바 없다. 그저 엄마 아빠가 만나 결혼하여 두 사람 사이에서 축복 받으며 태어난 게 죄라면 죄다. 그런 수민에게 엄마 아빠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라며 자꾸만 등 떠미는 현실은 지나치게 불공정하고 가혹한 조치다.

 

그날 밤, 엄마와 아빠의 갈등은 극에 달했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엄마 아빠 둘 다 닮지 않았다'는 수민이의 외침은 허공을 맴돌다 차가운 밤 공기에 부딪혀 사방으로 흩어진다. 영화 <흩어진 밤>은 부모의 이혼이 아이에게 어떤 감정으로 다가오게 하는지 섬세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아이의 솔직한 시선에 비친 어른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어른의 입장에선 고해와 다름없다. 

 

 

감독  이지형 김솔   

 

* 이미지 출처 : 씨네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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