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진정한 소울 푸드란.. 영화 '맛있는 영화'

새 날 2022. 2. 4.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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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직원 송이(정연주)는 재직 중이던 회사와의 재계약 불발로 백수 처지가 된다.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 하나 고민이 많다. 그날도 이런 고민 속에서 냉장고 문을 활짝 열었다. 마침 탄산음료가 똑 떨어졌다. 이를 구입하기 위해 무작정 밖으로 나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옛 친구 훈이(조현철)를 만나게 되는 송이, 간만에 밥 한 끼 같이 먹자며 의기투합한다. 그렇게 하여 나선 한밤중 먹거리 투어. 전설의 쌀국수 집을 찾기 위한 그들의 짧은 여정은 이렇게 시작된다.

 

대학 입시 합격자 발표의 날, 합격을 확인한 예니(손주현)는 뛸 듯이 기뻤다. 어려움을 이겨낸 스스로가 대견했다. 하지만 그녀의 주변엔 기쁨을 함께 나눌 친구가 없었다. 함께 입시를 준비한 상혁(신재휘)이 유일했다. 예니와는 달리 상혁은 비록 이번 대입에 실패하였으나 떡볶이와 함께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그의 마음씀씀이는 그녀에게만큼은 남다르게 다가온다. 이러한 인연 덕분에 예니와 상혁은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중년의 친구들이 모처럼 한 자리에 모였다. 미금(김금순)과 정아(이주영)도 참석했다. 근황을 주고받자마자 이들 사이에서는 자식 자랑이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보태는 말들 속에는 허세가 한가득이다. 그렇다고 하여 남들한테 질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살아오면서 늘어난 건 뱃살과 허세뿐이다. 누구의 허세가 더 강력한지를 가늠하자니 괜스레 짜증이 밀려온다. 그래서일까. 식탁 위에 정성스레 차려놓은 아구찜마저도 도통 맛을 느낄 수가 없다.

 

영화 <맛있는 영화>는 김정인 감독의 <나이트 크루징>, 정소영 감독의 <맛있는 엔딩>, 그리고 황슬기 감독의 <좋은 날> 등 세 편의 단편 영화를 옴니버스 형태로 묶어놓은 작품이다. 음식이라는 공통된 소재로 저마다 각기 다른 사연을 통해 삶의 단면을 이야기한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삶은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계약 만료로 직원들과 갖는 마지막 회식 자리. 회사를 떠나는 사람에게 아무 생각 없이 툭 내뱉는 '언제 밥 한 끼 하자'는 인사치레는 차라리 하지 않음만 못 하다. 말을 꺼내는 사람도, 그 말을 받아 삼키는 사람도 모두 빈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뒷맛만 씁쓸한 이런 표현보다는 차라리 '잘 살라'는 말이 훨씬 담백하게 들려온다. 

 

남녀가 만나 연애 감정을 느끼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에서 싹트기 시작한 달달함은 왠지 영원할 것 같지만, 우리의 삶이 항상 좋을 때만 있지 않듯이 남녀 관계 또한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평생을 남과 비교하거나 비교 당하며 살아온 사람들. 이젠 지긋지긋할 법도 할 텐데, 그 잘난 습성은 버리지도 못하고 어느덧 성장하여 독립한 자식들에게까지 닿아 있었다. 덕분에 허세 부리는 스킬만 자꾸 는다.

 

 

극 중 두 청춘 남녀는 빈말이 아닌 진짜로 '밥 한 끼 하자'는 말에 상당히 고파 있었다. 이들이 야심한 시간임에도 전설의 쌀국수 집을 찾으러 무작정 자전거에 올라탄 채 강변을 달린 건 모처럼 마주하게 되는 바로 이 진정성 때문이었다. 이들이 마침내 찾아낸 전설의 쌀국수 집. 꼭두새벽에 이곳에서 맑고 깊은 풍미가 느껴지는 쌀국수로 면치기를 한 뒤 건네는 말은 또 다시 '밥 한 끼 하자'였다. 빈말이 아닌 진짜로 '밥 한 끼 하자'는 말에 고픈 건 사실 우리 모두가 아닐는지.

 

 

떡볶이의 맛은 참 오묘하다. 고추장이 주 재료인 까닭에 근본은 매운 맛이지만, 추가되는 향신료와 조미료에 따라 달콤한 맛과 새콤한 맛 그리고 감칠맛까지, 무척 다양한 향미를 품고 있다. 대입을 마치고 합격증을 받아든 뒤, 그리고 연애 감정이 막 싹트기 시작할 무렵 먹는 떡볶이의 맛은 표면적으로는 맵더라도 실제로는 달달함으로 다가왔을 테고, 다양한 감정을 이미 경험했을 연애의 마무리 시점인 헤어질 때 먹는 떡볶이의 맛은 표면적으로는 달달하더라도 실제로는 무척 매운 맛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떡볶이는 우리의 삶을 쏙 빼닮았다. 

 

 

비싼 아구찜 앞에서는 서로 허세 부리기 바빴던 친구들이 신기하게도 저렴한 라면 앞에서는 한결 같이 무장해제되고 만다. 비록 집에서 끓이는 라면이 아닌 자판기를 통해 즉석에서 뽑아낸 라면이지만 여기에 김치만 곁들이면 세상 그 어떤 음식도 부러울 게 없다. 인생의 쓴맛, 단맛, 떫은 맛까지 골고루 맛보았을 나이에 보잘 것 없는 이 라면은 어떻게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걸까. 사실 라면에는 허세가 끼어들 틈이 없다. 단촐한 재료 그대로다. 기껏해야 계란과 김치가 더해지는 정도다. 게다가 라면은 학창시절 간식거리의 맹주로 꼽힌다. 맛과 추억 모두를 아우르는 이 라면 앞에서 무장해제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게 아닐까.

 

사실 소울 푸드란 그다지 거창하거나 특별하지 않다. 먹는 일을 빼놓고선 삶을 온전히 이야기할 수 없듯이 결국 우리의 삶 언저리에서 희노애락과 함께하며 맞닿아 있는 음식이 바로 소울 푸드 아닐까. 영화 <맛있는 영화>는 다양한 음식이 품고 있는 저마다의 매력을 통해 삶을 이야기한다. 허기진 청춘 남녀부터 허세로 배 부른 초로의 중년까지, 단촐하기 짝이 없는 이 음식들을 통해 잔잔한 위로를 얻게 된다. 

 

 

감독  김정인 정소영 황슬기

 

* 이미지 출처 : 아토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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