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어느 청년의 무기력증 탈출 신공.. 영화 '생각의 여름'

새 날 2022. 1. 31. 15:27
반응형

문예창작을 전공한 현실(김예은)은 시인 등단을 위해 공모전 출품을 준비 중인 이른바 시인 지망생이다. 총 5편의 시를 제출해야 하는데 그 가운데 4편을 완성하였고, 마지막 한 편을 창작 중이다. 반려견 호구와 함께 집에서 뒹굴거리며 싯구를 구상하거나 카페에 앉아 시상을 떠올리는 게 현실이 보내는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다. 그런데 근래엔 글귀가 머릿속을 맴돌기만 할 뿐 손에 통 잡히는 게 없다. 간신히 쥐어짜내어 완성한 문장들은 자꾸만 산으로 가려 한다.

 

그래, 차라리 쉬자. 현실은 글이 산으로 갈 땐 자신도 산으로 가야 한다는 지론을 펴는 인물이다. 신고 있던 신발을 등산화로 갈아신고 산을 오르는 건 그러니까 그녀 나름의 무기력증 탈출법이다. 현실의 본격 산행이 시작됐다. 산길 초입에서 아는 언니를 우연히 만난다. 학교 선배와 연인 사이였던 그녀의 근황이 궁금하던 차에 물었다. 선배와는 헤어졌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어정쩡한 관계는 왠지 더 힘들다고 생각하는 현실.

 

 

영화 <생각의 여름>은 시인을 꿈꿔온 한 시인 지망생에 관한 이야기다. 시 공모전 출품을 위해 창작 중이었는데 무기력증에 빠지면서 이로부터 탈출하는 신공을 발휘, 비로소 영감을 얻게 된다는 한여름 낮잠 속 꿈 같은 이야기다.

 

중턱쯤 오르니 이번에는 한때 절친이었던 영주(한해인)가 산을 오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반가운 마음이 앞섰으나 문득 쓰라린 과거를 떠올리니 왠지 만나서는 안 될 인물을 만난 느낌이다. 영주는 학창시절 현실과 절친 사이였으나, 그녀가 현실의 남친을 빼앗아간 뒤로는 서로 의절한 상태다.

 

 

그다지 궁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썰렁한 분위기가 싫어 억지로 그녀의 근황을 묻는다. 그럭저럭이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이번엔 남친과 잘 지내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아차 싶었다. 현실은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은 것이다. 영주는 황당한 표정만을 지을 뿐 도통 말이 없다.

 

 

영화는 현실이 산행을 통해 선배와 친구 등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담아낸다. 돌아오는 길엔 술친구를 불러낸 뒤 삼겹살에 소줏잔을 함께 기울이기도 한다. 오고 가는 대화는 지극히 시답잖은 것들투성이다. 연인을 만나 헤어지고 다른 연인을 만나다 또 다시 헤어지고, 뭐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더구나 헤어진 옛 연인에게 술김에 전화를 거는 무모함은 후회를 거듭해도 술만 먹었다 하면 자꾸만 반복되는 악습 가운데 하나다. 당최 고쳐지질 않는다.

 

 

극 중 배우들이 특별한 의미 없이 툭툭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는 날 것의 느낌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왠지 그맘때 청년들이라면 흔히 쓸 법한 생생한 언어적 느낌이라고 할까. 대사들이 살아 숨쉬며 꿈틀거린다. 아무래도 이 영화를 연출한 김종재 감독이 젊다 보니 그와 비슷한 감각들이 영상 속에 고스란히 반영된 게 아닐까 싶다.

 

 

어디로 튈지 몰라 예단하기 어려운 4차원적인 성향과 통통 튀는 듯한 묘한 매력을 뽐내는 현실의 모습은 어쩌면 현재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모습 그대로가 아닐까. 때문에 시인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 중이나 무기력증에 빠져 그로부터 헤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실의 모습에는 꿈과 이상을 쫓다가 더 큰 도약을 위해 잠시 멈칫하는 청년들의 고군분투가 비친다.

 

 

 

시인 등단이 지상 과제인 주인공을 내세운 까닭인지 영화에는 황인찬 시인이 쓴 <무화과의 숲> 등 총 5편의 시를 결합시키는 실험적인 연출이 시도됐다. 이는 영화와 시라는 이종 콘텐츠의 콜라보로써 관객에게 공감각적인 경험을 선사해준다.

 

 

현실이 헤어진 연인 민구(곽민규)와 얽힌 에피소드가 등장할 때마다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는 노래는 산울림 2집에 수록된 곡 <기대어 잠들어 버린 아이처럼>이다. 달콤하고 감미로운 김창완의 목소리는 민구를 향한 현실의 남은 미련이 어느 정도의 크기인가를 가늠케 한다.

 

또 다른 배경음악인 산울림 8집 수록곡 <지나간 이야기> 역시 산행하다 만난 사람들로 인해 과거완료형 기억들이 자꾸만 들춰지는 현실의 안타까운 심정을 대변한다. 해당 노래는 김창완 특유의 읊조림과 내지르는 창법을 만끽할 수 있는 대표 곡 가운데 하나다. 산울림 노래에만 담겨 있는 정체성인 몽환적인 노랫말과 음률은 한여름 낮잠 속 꿈처럼 다가오는 영상과 찰떡 궁합을 이룬다. 

 

영화 <생각의 여름>은 한 시인 지망생의 무기력증 탈출 신공을 통해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열일 중인 청년들에게 작은 위안을 선사해 준다. 어떤 상황에서도 발랄하고 유쾌하기 이를 데 없는 주인공 현실은 비슷한 고민, 그리고 현실과 마주하고 있을 이 시대 청년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오게 한다.

 

 

감독  김종재   

 

* 이미지 출처 : 인디스토리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