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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믿고 있는 진실은 진실일까.. 영화 '빛과 철'

새 날 2022. 2. 2.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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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적한 국도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한다. 마주 오던 두 대의 차량이 정면 충돌한 것이다. 중앙선을 넘어온 차량에 탑승해 있던 희주(김시은)의 남편은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추돌 당한 차량에 타고 있던 영남(염혜란)의 남편은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에서 치료 중이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희주는 마음을 추스른 뒤 5년 전 재직했던 공장에 재취업한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영남이 자꾸만 희주의 눈에 띄기 시작한다. 우연일까.

 

희주는 몹시 불편해한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귀에서는 이명이 들려오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등 몸에서 이상 신호가 감지됐다. 일단은 영남을 피하고 보는 게 급선무였다. 일종의 현실도피였다. 하지만 희주의 회피는 오래가지 못 한다. 알고 보니 영남은 희주가 재직 중인 공장의 식당 직원이었다. 비록 담당 직무는 달랐으나 동일한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니 두 사람이 마주치는 일은 다반사였다. 두 사람의 모진 인연은 이렇게 다시 이어진다. 

 

 

영화 <빛과 철>은 교통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남겨진 가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과 갈등을 섬세하게 다룬 심리물이다. 배종대 감독의 첫 장편 영화로,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배우 염혜란이 한국경쟁 부문 배우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영남의 딸 은영(박지후)이 희주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희주가 공장에 다시 출근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처음에는 희주 역시 은영이 그저 우연히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드러나는 은영의 정체는 의외였으며, 그녀가 희주에게 풀어놓은 이야기는 더더욱 놀랍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은영은 교통사고가 있었던 그날 자신의 아버지가 사실은 극단적 선택 시도를 위해 차를 몰고 나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은영은 희주가 생각한 것처럼 우연히 만난 게 아니었으며, 의도적으로 희주에게 접근해 온 인물이었다. 희주가 영남을 만날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은영 역시 희주를 볼 때마다 죄의식으로 인해 괴로워했던 것이다. 교통사고 가해자의 가족에서 피해자의 가족으로 입장이 급선회하게 된 희주. 그녀의 감정은 폭발한다.

 

 

극은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운명이 뒤바뀐 남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희주의 모습을 담아낸다. 아울러 입장이 변화함에 따라 그때마다 널뛰기 하는 희주의 심리 상태를 섬세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가해자의 처지에 있을 땐 미안한 감정 때문에 피해자 가족의 얼굴조차 똑바로 쳐다보지 못 할 만큼 의기소침해하던 희주였지만, 피해자의 입장으로 상황이 급선회하게 된 이후에는 180도 달라진 면모를 드러낸다. 

 

 

영남은 희주와 달리 정황에 근거한 섣부른 판단을 철저히 경계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돌봐온 것처럼 그녀의 남편이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입장이 뒤바뀌는 혼란 속에서도 그녀의 태도는 한결 같았다. 이렇듯 뚝심 있는 영남의 일관된 자세는 등장인물의 심리 상태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관객의 시선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교통사고로 남편이 죽은 뒤 사건의 뒷수습은 대부분 희주의 오빠 몫이었다. 희주는 이를 처리할 만한 정신 상태가 아니었던 까닭이다. 경찰의 사고 조사에서 보험 처리까지 모든 일은 오빠가 도맡아 처리했다. 희주에겐 그런 자상한 오빠였다. 그러나 그 역시 그날의 교통사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희주는 더욱 큰 혼란에 빠져든다. 

 

 

영화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뒤바뀌는 혼돈 속으로 관객을 몰아간다. 의도된 연출이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등장인물의 심리 상태를 훑고, 여기에 이미 알려진 사실과 사건 정황의 분석을 더해 진실이 무엇인지 헤아리도록 관객을 실험한다. 극 중 곳곳에 심증을 굳히게 할 만한 장치를 만들어놓아 관객의 판단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우리는 흔히 같은 사건을 놓고도 잣대를 달리 적용함으로써 전혀 다른 결과를 도출해내곤 한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과 작은 정황만으로 사건을 쉽게 예단하곤 한다. SNS가 대중화된 이후 이러한 현상은 더욱 잦다. 영화 <빛과 철>은 가해자와 피해자 가운데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명확히 재단하려는 작품이 아니다. 교통사고의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심리극을 통해 우리가 흔히 진실이라 믿고 받아들여온 사실이 실은 진실이 아닐 수 있음을 우회적으로 꼬집는다. 당신이 믿고 있는 진실은 과연 진실일까. 

 

 

 

감독  배종대   

 

* 이미지 출처 : 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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