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영화 '캐논볼'

새 날 2022. 2. 25. 23:45
반응형

군복무 중이던 형이 병영 내에서 살해됐다.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현우(김현목)는 실의에 빠진다. 장례를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하교 중이던 현우에게 누군가가 접근해온다. 취재기자였다. 형을 죽음으로 내몬 총기 사건과 관련하여 인터뷰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기자가 무심코 내뱉은 발언 하나가 현우의 귓속으로 들어와 콕 박힌다. 총기 사건의 가해자 가족이 현우와 근거리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자가 언급한 사람의 정체가 밝혀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현우의 곁에서 늘 함께해온 사람이었다. 여느 때처럼 등교한 현우. 교내에서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특별한 장면 하나를 목격하게 된다. 경찰관들이 담임교사인 연정(김해나)을 둘러싸고 대화하는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연정의 표정은 유독 어두운 듯했다. 평소 아이들과 거리낌 없이 지내온 터라 그녀의 변화는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영화 <캐논볼>은 병영 내 총기 사건으로 각기 상처를 안은 가해자 및 피해자 가족의 이야기다. 한 사람은 가해자의 누나, 또 한 사람은 피해자의 동생. 이렇듯 서로 다른 처지에 놓인 두 사람은 분노와 죄책감의 소용돌이 속에서 운명처럼 서로에게 다가간다.

 

어느 날,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려던 연정에게 현우가 접근해온다.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영문을 모르는 연정은 그를 어떻게든 피하려 했으나 현우가 불쑥 꺼내든 발언은 그녀를 꽁꽁 얼어붙게 만든다. 동생과 관련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녀의 동생 때문에 형이 숨졌다며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을 요구했다. 가해자의 가족으로서 마땅히 느낄 법한 죄책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현우. 그녀는 외면하기 어려웠다. 담임교사와 학생이라는 특수 관계는 그녀를 더욱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옭아맨다. 두 사람은 그렇게 바다로 향한다.

 

 

극중 현우는 형의 장례를 치르면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형의 부재로 인한 감정이 아직은 내면 깊숙이 스며들지 않은 까닭이다. 현우는 생전의 형과 사이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형은 권위적인 데다가 툭하면 완력을 행사하려 했기에 자주 다퉜다. 이 때문일까. 현우는 형이 생전에 남긴 음성 일기를 반복하여 들으며 군 생활을 통해 그가 과연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고, 또한 어떻게 생활해왔는가를 반추하게 된다. 

 

 

반면 연정은 동생과의 사이가 꽤 좋았다. 그녀의 기억 속 동생은 특별히 말썽 부리는 일 없었고, 누나와의 소통도 원활했다. 연정은 동생이 어떻게 이토록 끔찍한 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인지 의아했다. 도대체 무엇이 멀쩡하던 동생을 이런 괴물로 변모시킨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동생은 힘겹게 면회온 누나에게 사건과 관련해선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진실을 알고 싶었던 연정은 영문도 모른 채 매번 발걸음을 돌리게 된다.

 

현우와 연정이 맞닥뜨리게 될 운명은 잔인했다. 한 사람은 죽임을 당한 피해자의 가족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피해자를 죽인 가해자의 가족. 형의 죽음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슬픔을 떠안게 된 현우와 동생의 살인 행위로 커다란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는 연정은 교사와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엮이면서 서로가 피해갈 수 없는 운명적 관계로 내몰린다.

 

 

영화는 일종의 로드무비다. 현수가 원하던 대로 연정이 바다를 향해 차를 몰면서 두 사람의 길지 않은 여정은 시작된다. 물론 이들의 여정이 출발부터 순탄했던 건 아니다. 두 사람의 관계처럼 연신 삐걱거린다. 형을 잃은 현수의 슬픔은 분노가 되어 연정에게 가 닿고, 현수의 부탁은 요구로 돌변하더니 어느덧 협박이라는 이름의 비수가 되어 연정에게 날아와 꽂힌다. 현수의 마음은 분노로 들끓었고, 연정이 마음은 너무 아팠다. 가해자 가족으로서의 죄책감 때문에 현수의 요구를 마지 못해 받아들였던 연정은 그 수위가 점점 높아지자 더욱 힘겨워 한다.

 

 

바다는 생명의 기원이자 삶의 모태다. 세상을 모두 품을 것만 같다. 현수에겐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수의 형은 유독 바다를 좋아했다. 연정에게도 동생과의 행복했던 시간을 함께 나누던 색다른 추억이 있는 곳이다. 분노는 날선 칼날이 되어 상대에게 향하고, 죄책감은 방패가 되어 이를 방어한다. 죄책감과 분노가 만나 일으키던 독한 화학작용은 바다에 이르면서 비로소 무뎌진다. 움켜쥐었던 주먹을 조심스럽게 펼쳐보이는 현수의 손안엔 다름 아닌 바다가 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설정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이야기하는 영화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어떤 작품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또 어떤 작품은 사건의 진실 여부와 관계 없이 결국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영화 <캐논볼>은 진실을 파헤치지도, 그렇다고 하여 모든 고통을 살아남은 자들의 몫으로 남겨놓지도 않는다. 살아남은 자들의 화해와 용서, 그리고 위로를 통해 남은 삶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맡은 배역에 따라 팔색조처럼 변신하는 배우 김현목과 연정 배역을 소화한 배우 김해나의 차분한 연기가 인상적이다. 영화 <캐논볼>은 병영 내에서 발생한 총기 사고의 진실을 파헤치기보다 살아남은 사람들, 후유증을 겪는 이들에게 카메라의 초점이 맞춰진다. 피해자 및 가해자 가족의 운명적인 관계를 통해 화해와 용서의 손길을 내민다. 살아남은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

 

 

감독  정승민 

 

* 이미지 출처 : (주)이놀미디어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