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신체는 정직하다 <아워 바디>

새 날 2020. 3. 22.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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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째 행정고시를 준비해온 31세의 자영(최희서). 시험에 번번이 낙방하면서 자존감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기세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보다 지금 당장 겪고 있는 고통이 그녀를 더욱 힘들고 지치게 한다. 결국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혀온 고시 낭인의 생활에서 탈출을 감행키로 한 그녀.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냉혹했다. 직무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오롯이 고시 공부에만 전념해온 31세의 여성에게 세상은 무자비했다. 직장을 구할 수 없었던 자영은 친구 민지(노수산나)가 근무하는 투자회사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게 된다. 친구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기회조차 얻기가 만만치 않은 게 바로 현실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자영은 길 위에서 달리기를 하던 현주(안지혜)와 맞닥뜨리게 된다. 



영화 <아워 바디>는 오랜 고시 준비로 무기력증에 빠진 한 여성이 우연히 달리기 운동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삶에 눈을 뜨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제43회 토론토국제영화제 디스커버리 부문 등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되면서 국내외로부터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배우 최희서가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했다.


자영의 시선에 포착된 현주의 모습은 모든 면에서 자신과 상반된 인물이다. 삶에 지쳐 의욕을 상실한 자영과는 달리 그녀는 건강미와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이의 원천은 무엇일까. 달리기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달리기 운동에 열중하는 그녀의 모습이 무기력증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자영에겐 일종의 자극제였다. 



현주와의 인연이 닿으면서 본격적으로 달리기에 입문한 자영. 처음에는 운동 뒤 으레 뒤따르는 고통과 내면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눈물샘이 폭발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이후 몸이 환경에 적응하고 혼란을 겪던 감정도 일정 부분 정리되거나 진정 국면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변화하는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소심한 자신과는 달리 솔직하고 당당하기까지 한 성격 탓에 자영에게 현주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술을 마시기 위해 운동한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데다 욕망마저 감추지 않던 현주에겐 거침이 없었다. 그녀와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돈독해져갔다.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던 덕분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자영과 함께 운동에 나선 현주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충격을 딛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자영. 그녀는 관성에 몸을 맡긴다. 결코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영화는 근래 청년들이 겪을 법한 현실의 어려움을 자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투영시킨다. 안정된 일자리가 부족하고 경쟁마저 치열하다 보니 이른바 공시족으로 내몰리는 청년들의 어려움을 현실감 있게 그렸다. 수많은 이들이 공무원이 되기 위해 수년씩 준비하고 있으나, 바늘구멍보다 작은 확률에 늘 고배를 마셔야 하는 상황. 임시직인 기업체 인턴마저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하고, 또한 인턴이 된 뒤엔 더욱 냉엄한 현실과 마주해야 하는, 오늘날 청년들의 고단한 현실을 꼬집는다. 


자영은 8년째 고시를 준비하며 어느덧 30대의 나이에 접어들었으나 합격의 가능성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노력하는 만큼 그에 비례해 대가가 따르지 않는, 비대칭적 구조 때문이다. 이 승산 없는 싸움에서 자영은 결국 패배를 선언하게 된다. 두 손 두 발 모두 들었다. 백기 투항인 셈이다. 



자영이 삶에 지쳐 무기력 속에서 헤맬 즈음 우연히 접하게 된 달리기. 이는 고시 준비와 달리 노력하는 만큼 그 대가를 고스란히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물리적 실체로서의 신체는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훨씬 정직했다. 달리기를 하게 된 뒤 신체의 변화를 몸소 겪으면서 조금씩 자신감을 회복하게 된 그녀. 그동안 미래를 위해 저당 잡혀온 현재를 더 이상 낭비하지 않기로 작정한다. 



기성세대나 그녀의 동료, 그리고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극중 당장의 앞가림조차 못하는 자영의 결정과 행동은 터무니없는 결과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혹자는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현실 속 청춘들과 달리 그러한 처지에 매몰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그녀의 행동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이 극적인 대비를 통해 현실에 치여 우리 스스로를 지우거나 애써 감추며 살아온 삶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현실의 어려움이 청년들에게는 일상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세상은 이들에게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굴레 속에서 청년들은 점차 웃음기를 잃어가고 있다. 더 나아가 자영이 그랬던 것처럼 무기력증으로 이들을 자꾸만 내몰고 있다. 영화 <아워 바디>는 현실의 고단함으로 인해 어쩌면 거세되었을지도 모르는 현대인들의, 특히 여성들의 욕망을, 달리기라는 매개를 통해 수면 위로 끄집어내어 솔직담백하게 이야기한다. 독특한 소재와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감독  한가람


* 이미지 출처 :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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