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현대인들의 나약한 본성 <죄 많은 소녀>

새 날 2020. 3. 12.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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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2년생 경민(전소니)과 영희(전여빈), 그리고 한솔(고원희). 같은 학급 친구 사이인 이들은 어느 날 밤늦은 시각까지 공연을 함께 관람한 뒤 각자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경민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 했다. 실종된 것이다. 현장에 있던 CCTV에는 영희와 경민이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장면이 찍혀 있었다. 학교 측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뒤이어 경찰의 수사가 진행된다. 모든 정황은 영희를 가해자 내지 방조자로 지목하고 있었다. 


영화 <죄 많은 소녀>는 청소년의 자살을 다룬다. 하지만 자살 사건 그 자체가 아닌 숨진 소녀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시체스영화제, 프리부르영화제에 공식 초청되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영희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 배우 전여빈은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했다.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영회는 경민의 죽음을 부추긴 장본인으로 의심받는다. 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경민 엄마(서영화). 그녀는 모든 결과물이 영희에 의해 빚어졌다고 굳게 믿는다. 친구들과 교사, 경찰 역시 같은 입장에 선다. 사건 배후로 지목된 현실에 크게 당황한 영희는 결백을 주장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덧붙인 말들은 맥없이 허공으로 흩어지거나 되레 부메랑이 되어 그녀를 궁지로 몰았다. 


경민은 결국 숨진 채 발견된다. 딸의 죽음으로 이성을 잃은 경민 엄마, 더불어 주변 인물들은 마치 토끼몰이를 하듯 영희를 막다른 길로 몰아세운다. 또래들의 따돌림으로 그녀의 학교생활은 철저히 망가졌고, 그런 그녀에게 아이들은 무리지어 다니며 집단 폭행을 가했다. 일종의 단죄였다. 광기에 가까운. 



영화는 한 소녀의 죽음 이후 죄책감과 책임감이 가둬놓은 현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벌이는 주변인물들의 행태를 고발한다. 경민의 죽음으로부터 최대한 거리두기를 원하는 주변인물들이 어떻게 영희를 제물로 삼으며, 진실이 밝혀진 뒤에는 또 어떻게 변모해 가는지 그들의 면면을 쫓는다.



사건이 벌어지자 학교장은 실체를 파악하고 반성하기보다 자신의 안위와 학교의 이미지 추락부터 염려했다. 담임교사(서현우)는 마녀사냥을 당하며 모진 고초를 겪은 영희에게 과거를 이제 그만 덮어버리는 게 모두에게 이롭지 않겠느냐고 설득한다. 영희를 일찌감치 경민 사건의 가해자로 점찍고 매몰차게 몰아붙였던 전력이 있는 그에게 과연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20년 동안 교직에 몸담아왔다는 같은 학교의 한 교사. 그는 경민의 죽음으로 아이들이 크게 동요하자 이런 일에 휩쓸리기보다 “영어 단어 한 개라도 더 암기하는 자가 결국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학교현장의 인성 부재 현실을 꼬집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극중 아이들은 아직 고등학생에 불과했으나 어른 이상으로 영악했다. 작은 이익 앞에서, 그리고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친구와의 의리마저도 쉽게 저버렸다. 경민이 영희 때문에 죽었다며 그들 스스로 단죄에 나선 아이들은 가치판단보다 그저 이익에 따라 그때그때 움직일 뿐이었다. 상황이 급변하자 태세 전환 뒤 재빠르게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은 어른 뺨친다.  


자신의 딸이 실종된 뒤 아직 사망 여부조차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망 보험금 이야기부터 꺼내드는 경민 아빠로부터는 현대인들의 속물근성이 엿보인다. 실체가 드러난 뒤에도 여전히 영희 주변을 기웃거리며 과도한 반응을 보였던 경민 엄마. 실은 경민의 죽음에 적지 않은 책임이 있으며, 결국 죄책감이라는 굴레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에 가까웠다.



학급 친구들 앞에 서서 수화를 통해 죽으러 왔다는 의사표현을 해도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되레 박수로 응답하는 담임교사와 친구들. 진실과 괴리된 이들의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 속에서 실체를 헤아리지 못 하고 헛된 욕망에 쉽게 미혹되거나 집착하는 현대인들의 민낯을 바라보는 듯해 씁쓸한 감정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영화 <죄 많은 소녀>는 한 소녀의 죽음 이후 주변인물들이 해당 사건으로부터 의도적인 거리두기에 나서고 실체적 진실 없이 오로지 정황만으로 가하는 마녀사냥을 통해 현대인들의 나약한 본성을 비유하는 작품이다. 강렬한 주제의식과 배우들의 빼어난 연기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감독  김의석


* 이미지 출처 : 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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