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우리 선생님을 고발합니다

새 날 2020. 3. 2.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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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한 초등학교. 교사 드라즈데초바(주자나 마우레리)가 새로 부임해온다. 그녀는 공산당 대표 당원이자 모스크바 중앙당과의 관계를 이용, 자신이 맡은 학급의 학부모들에게 재능 기부와 증여를 강요한다. 집안 청소 등 잡일은 물론, 교내외 대부분의 일들을 학부모와 아이들을 통해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거부하거나 싫은 내색을 드러내는 아이에겐 자비 없는 보복이 가해졌다. 


영화 <우리 선생님을 고발합니다>는 사회주의 국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산당 대표와 교사의 지위를 이용,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갑질을 행사하던 한 교사에 대한 이야기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1989년 이른바 벨벳혁명으로 붕괴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됐다.


드라즈데초바 교사의 부임 첫날 행위는 기행에 가까웠다. 그녀는 학급의 아이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학부모의 직업까지 꼼꼼히 조사했다. 이를 토대로 다양한 영역에서 생업에 종사 중인 학부모들을 장차 지극히 사적이며 은밀한(?) 작업에 투입시킬 요량이었다. 이를테면 세탁기 수리, 음식물 구입과 배달, 요리 등 교사의 갑질 수준은 평범한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다. 그녀가 사전에 학부모들의 직업을 일일이 확인한 데엔 계획이 다 있었던 셈이다. 



드라즈데초바는 정치권과 깊숙이 연루돼 있었던 까닭에, 더구나 당시 사회주의 체제의 정점이던 소련의 권력 핵심부와 간접적으로 연이 닿아 있었던 까닭에 학교장이나 교감도 그녀를 어쩌지 못했다. 그녀의 횡포를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손을 쓰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교사의 불공정하고 부당한 처사에 몇몇의 아이들이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이들에게 돌아오는 건 낮은 점수와 낯 뜨거운 인신공격뿐. 학부모들은 드라즈데초바의 갑질이 지나치다는 걸 알면서도 공산당 대표라는 권력과 교사의 권한까지 고루 갖춘 그녀가 아이의 장래 문제를 움켜쥐고 있다는 현실에 모른 척 눈 감기 일쑤였다. 교사는 교사대로 이러한 상황을 교묘히 역이용했다. 이렇듯 방치 아닌 방치 속에서 교사와 아이, 그리고 교사와 학부모 간의 비뚤어진 관계는 한동안 지속된다.



체조를 좋아하던 한 소녀는 자신의 부모가 교사의 사적인 심부름 부탁을 거절하자 이후 교사로부터 모진 차별과 모독을 감수해야 했다. 거듭된 교사의 횡포에 급기야 체조마저 그만두게 된 소녀. 교사와 또래들에 의해 학교에서 점점 고립되더니 왕따가 되었고, 결국 이를 참다못한 소녀는 자살을 기도하게 된다.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분노한 소녀의 부모가 학부모 회의를 제안했고, 교장이 이를 소집했다. 학부모들은 크게 둘로 나뉜다. 교사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당한 아이들의 부모,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평소 교사에게 잘 협조하여 혜택을 본 아이들의 부모, 이렇듯 두 부류로 나뉜다. 교사의 갑질에 문제가 있다며 탄원서를 제출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이후 열띤 토론이 진행된다. 탄원서 제출은 이뤄질 수 있을까?



영화는 학부모들이 긴급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학교로 속속 모여드는 장면, 교사가 아이들의 이름과 부모의 직업을 일일이 확인하는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시작된다. 곧이어 학부모 회의가 왜 소집되어야 했는지, 그동안 교사가 꾸민 일과 아이들에게 어떤 악행이 행해졌는지 차례차례 복기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사의 끔찍했던 만행이 낱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사랑마저 갑질을 통해 얻으려 한 그녀의 파렴치함에 관객들은 혀를 내두르게 된다. 


예상대로 탄원서에 서명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누군가는 논리적으로 교사의 문제점을 요목조목 짚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감정에 기대어 탄원서의 절실함을 호소했지만, 많은 부모들이 향후 자신과 아이에 대한 불이익을 두려워하며 서명에 주저했다. 특히 교사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부모들은 남의 고통 따위는 관심 밖이라는 듯 교사를 두둔하기에 바빴다. 각기 향유하게 될 이익의 크기에 따라 진영을 나누어 다투는 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화 <우리 선생님을 고발합니다>는 교사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갑질 문제를 파헤친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당원으로서 정치권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교사를 통해 부패한 권력의 속살을 드러냄으로써 당시 사회주의 체제가 왜 몰락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당위성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더불어 사회주의 진영의 최고 정점이던 소련의 영향력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일개 교사에게까지 어른거릴 정도로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던 당시의 씁쓸한 현실도 꼬집는다. 



* 감독  얀 흐르베이크


* 이미지 출처 : (주)캔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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