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제로섬으로 수렴해가는 삶

새 날 2020. 2. 24.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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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를 도저히 주체할 수 없어 침대 위에서 폴짝폴짝 튀어 오르는 빌리. 하지만 더는 올라갈 수가 없다. 시간이 흘러 폭풍 성장한 빌리는 무대 위 한 마리 백조가 되어 우아한 날개를 활짝 펼친 채 하늘 높이 도약한다. 11세 소년의 예술적 성장을 이야기하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배우 지망생 미아. 어느 날 그녀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배우가 카페에 들어서자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배우로서의 꿈이 더욱 간절해지는 순간이다. 시간은 훌쩍 흘러 배우가 된 미아. 언젠가 유명배우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 역시 쏟아지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카페 안으로 유유히 들어선다. 젊은이들의 꿈과 열정을 뮤지컬 장르로 극화한 영화 <라라랜드>다. 


<빌리 엘리어트>는 2001년, 그리고 <라라랜드>는 2016년에 각기 개봉한 영화다. 연관성이라곤 1도 없을 것 같은 이들 두 작품은 몇 가지 측면에서 공통점이 존재한다. 빌리가 발레리노의 꿈을 키워간다는 점. 미아와 세바스찬이 배우와 재즈 피아니스트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점. 다시 말해 꿈을 이루기 위해 열정을 쏟아 붓는 젊은이들의 성장담이라는 측면에서 두 작품은 서로 맞닿아 있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다.



1980년대 영국 탄광촌에서 살아가던 빌리(제이미 벨)는 흥과 끼가 다분한 소년이다. 이러한 기질 때문일까. 그는 복싱보다 소녀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발레에 유독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빌리는 윌킨슨(줄리 월터스) 부인의 배려로 발레 수업에 참여하게 된다. 소년은 이때부터 발레리노의 꿈을 본격적으로 키워간다. 하지만 소년을 둘러싼 환경은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탄광촌이라는 특성도 무시하기 어려운 데다, 무엇보다 보수적인 성향의 아버지(게리 루이스)로 인해 자신의 꿈을 펼치기가 쉽지 않았다. 빌리는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 그는 대중성을 좇는 음악보다 재즈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뮤지션이다. 덕분에 현실은 늘 어려움투성이다. 그와 우연히 인연을 맺은 배우 지망생 미아(엠마 스톤) 역시 열심히 노력해보지만, 오디션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는 등 고달픈 일상을 살아가는 중이다. 꿈의 도시 LA를 배경으로 두 젊은이가 함께 열정을 부여안은 채 꿈을 좇으며 사랑을 키워나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아름답기 짝이 없다. 여기에 화려한 영상미와 매력적인 음악까지 더해졌다. 두 사람이 꿈꾸던 열정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꽃을 피우게 될까? 



빌리가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예술적 성취를 이루는 과정만으로도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으로 다가온다.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발레리노로 성장하는 여정이 밀도 있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제이미 벨의 연기도 한 몫 단단히 거든다. <라라랜드> 역시 빼어난 영상미와 귀를 즐겁게 하는 재즈 선율만으로도 충분히 박수갈채를 받을 만한 작품이다. 영화 <기생충>으로 최근 화제가 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3년 전 감독상 등 무려 6개 부문의 상을 거머쥐었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 영화가 개봉 당시 평단의 높은 평가와 관객들로부터 호평이 이어졌던 데엔 조금 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빌리가 주변 사람들 몰래 발레 수업을 들으며 발레리노의 꿈을 키워가던 당시는 탄광촌에서 파업이 벌어지던 때다. 광부인 아버지와 형도 파업에 적극 동참 중이었다. 이들과 가치관을 달리하는 사람들, 즉 파업에 반대하는 동료들에겐 계란과 욕설 세례가 퍼부어졌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빌리의 재능을 확인하게 된 빌리의 아버지. 빌리를 발레리노로 성장시키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가 금과옥조로 여겨오던 신념과 가치관을 포기한 채 파업 반대 무리에 합류한다. 



미아와 세바스찬은 꿈을 이루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노력한다. 오디션에 합격하여 프랑스로 향하게 된 미아. 세바스찬 역시 전국 투어를 이어가며 재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자신들이 바라는 꿈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선 두 사람. 어느덧 시간은 흐르고, 세바스찬은 재즈 피아니스트로서 자신이 운영하는 재즈바에서 평소 꿈꿔온 음악을 마음껏 펼치게 됐고, 미아는 미아대로 특급대우를 받는 유명배우로 급성장하게 된다. 두 사람의 꿈이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LA 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나란히 꿈을 좇고 열정을 쏟아 부을 당시 두 사람이 나누던 애틋한 사랑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빌리는 피눈물 나는 연습을 통해 주변의 멸시와 반대를 극복하고 마침내 정상에 우뚝 서게 된다. 미운 오리새끼에서 화려한 백조로 환골탈태한 것이다. 미아와 세바스찬은 또 어떤가. 미아는 오디션에서 매번 고배를 마시면서도 열정을 불사른 끝에 결국 배우로서의 꿈을 이룬다. 세바스찬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은 채 외로운 길을 선택한 끝에 독창적인 재즈 뮤지션으로 성장한다. 세 사람의 성장담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이지만, 자칫 뻔하고 심심하게 마무리될 법한 서사에 극적인 반전 및 전복 요소가 가미되면서 더욱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 



빌리의 성공은 빌리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과감히 포기해야 했다. 빌리의 성공과 신념을 등가 교환한 것이다. 물론 둘 중 어느 것이 더 소중하다고 쉽게 단정 지을 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다. 저마다 가치관이 다른 까닭이다. 다만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다른 무언가를 잃어야 한다는 명제만큼은 부인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미아와 세바스찬의 성공 과정은 어땠을까? 이들이라고 하여 특별히 달랐을까? 미아는 타고난 재능과 열정이 더해져 훌륭한 배우로 성장하지만 그의 반대급부로 사랑을 잃게 된다. 스스로 사랑 대신 성공을 택한 셈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사랑과 성공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소중하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마다의 가치판단에 따라 누군가는 성공을, 또 다른 누군가는 사랑을 택할 테니 말이다.



한없이 아름답게 펼쳐지던 영화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씁쓸한 감정으로 뒤바뀌었던 건 다름 아닌 이렇듯 지나칠 정도로 현실적인 장치들이 더해졌던 까닭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의 성장담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영감을 부여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와 <라라랜드>가 바로 그러하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이 성장하여 꿈을 이루기까지 그저 순탄한 과정만을 보여주었다면 관객들은 큰 감흥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별다른 반향도 없었을 것이다. 현실적인 요소들이 작품 속에 녹아들어 발현된 덕분에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고 흥미를 유발했으리라. 이러한 요소들로 인해 이들 영화의 작품성이 빛을 발하고 보는 재미를 배가시켰을 것이다.


그렇다면 화려한 영상과 음악이라는 의도된 장치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건 무얼까? 세상 모든 일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에둘러 표현한 게 아닐까? 안타깝게도 누군가의 성장과 성공 과정을 바라보며 잠시 누릴 수 있었던 호사스러운 감정은 이렇듯 씁쓸한 반전을 통해 잠시 잊고 있던 현실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마치 환상이라는 허구 속에서 헤매다 망치로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다. 환상을 부숴버리는 전복의 힘이 공교롭게도 이들 영화가 갖춘 힘이자 미덕이었던 셈이다. 우리의 삶이 결국 제로섬으로 수렴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이렇듯 아름다운 걸작으로 승화시킨 감독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 이미지 출처 : (주)팝엔터테인먼트, 판씨네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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