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관객이 줄거리를 만들어가는 영화 '한나'

새 날 2019. 12. 30.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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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일상을 살아가던 한나(샬롯 램플링), 어디론가 갈 채비를 마친 남편(안드레 윌름스)과 함께 집을 나선다. 먼 길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형무소였으며, 돌아오는 길은 갈 때와는 달리 오직 한나 한 사람뿐이었다. 남편이 수감된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한나의 일상, 대중교통을 이용해 집과 직장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이 이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손주의 생일을 맞아 케이크를 손수 만들어 아들의 집을 방문하게 된 한나. 하지만 아들이 그녀에게 내뱉은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다시는 안 봤으면 좋겠다는 독설이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문전박대를 당한 그녀는 결국 남몰래 울분을 토하고 만다. 


영화 <한나>는 노년에 접어든 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남편이 수감된 뒤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누리려 노력해보지만, 미세하게 발생한 균열의 틈새가 벌어지고 내면에 절망감이 싹트면서 그로부터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을 절제된 영상미로 그렸다. 



이 영화는 2017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과 베스트스테이지상을 수상,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특히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배우 샬롯 램플링의 남다른 연기력은 평단의 뜨거운 관심을 모으기에 모자람이 없다.


영화는 집요할 정도로 한나의 일거수일투족에 초점을 맞춘다. 말없이 무언가를 응시할 때의 눈빛과 표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꽃을 다듬거나 손을 씻는, 그도 아니면 옷을 갈아입는 등의 자연스러운 일상의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모두 담아낸다. 뿐만 아니다. 그녀가 어딘가로 이동할 때에도 카메라의 초점은 오로지 한나의 표정 그 한 지점만을 향한다. 영화속 그녀는 대사보다 주로 표정과 눈빛으로 말을 건넨다.



지나치게 정적인 영상에, 도저히 맥락을 짚을 수 없는 난해한 서사. 감독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가 싶어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었으나 결국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영화는 같은 패턴으로 뚝심 있게 쭉 밀고 나간다. 영화가 끝나고 한참 지난 뒤에도 ‘이게 도대체 뭐지’ 하는 생각이 좀처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한나의 절망적인 표정과 고통스러운 눈빛만이 뇌리에 남아 맥락 없는 서사의 줄기와 각기 따로 놀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매우 불친절한 영화다. 조금 에둘러 표현하자면, 예술성 내지 작품성을 극대화하여 평론가들 입맛에 맞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데다 재미마저도 찾을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서사가 뚜렷하지 않은 건 답을 제시하지 않고 영화속 공백을 관객의 경험과 상상으로 채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 감독의 숨은 배려라고 하니, 나름의 성과와 의미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한나의 남편이 형무소에 수감된 데엔 아들과의 피치 못할 사연이 존재했을 것 같다. 이 사건으로 부자간의 관계는 금이 갔고, 중간에서 이를 조율하려던 한나마저도 쉽지 않은 관계 개선 탓에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조용하던 일상이 차츰 붕괴되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됐을 테다. 이를 극복하고자 직장도 다니고 커뮤니티 활동도 해보지만 그녀의 내면은 갈수록 혼란스럽기만 하다. 한나의 표정엔 늘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고통, 회한 따위의 감정이 교차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나가 지하철역으로 들어선 뒤 플랫폼에 올라서기까지의 지난하고 험난한 과정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고통이라는 긴 터널을 닮았다. 비록 이 터널이 아주 힘들고 먼 여정일지 모르겠으나 한나는 이를 모두 이겨내고 결국 열차 앞에 당당히 선다. 절망을 딛고 선 그녀로부터 희망을 엿보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감독  안드레아 팔라오로   


* 이미지 출처 : 영화사 마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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