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균형 잡힌 삶의 중요성 <칠드런 액트>

새 날 2020. 3. 5. 21:03
반응형

어느 누구보다 일에 열정적이며 충실했던 판사 피오나(엠마 톰슨). 종교와 윤리 분쟁부터 누군가의 생사가 달린 민감한 사안까지,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 판결 현장에는 늘 그녀가 있었다. 판사라는 직업인으로서의 높은 명망은 이렇듯 오랜 시간에 걸친 노력과 경험이 축적된 결과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법원으로부터 긴급 전화가 걸려온다. 


병원 측이 백혈병에 걸린 17세 소년 애덤(핀 화이트 헤드)의 강제 수혈을 요청해온 것이다. 수혈을 못할 경우 자칫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는 상황. 부모는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고, 소년 스스로도 부모의 견해를 따른다는 입장을 취했다. 한 소년의 생명을 놓고 저울질해야 하는 긴박한 순간, 피오나의 손길은 더욱 분주해진다. 



영화 <칠드런 액트>는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던 17세 소년에게 아동법을 근간으로 판결을 내린 뒤, 예기치 않은 삶의 변화를 겪게 되는 한 판사의 이야기를 그렸다. 1998년 소설 <암스테르담>으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이언 매큐언의 동명 소설이 이 작품의 원작이다.


피오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완벽주의자다. 이러한 기질은 업무 성과로 이어졌다. 그녀는 판사로서 크게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법복을 벗은 일개인으로서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오직 일밖에 모르던 피오나, 남편 잭(스탠리 투치)은 아내와의 관계가 온통 불만투성이였다. 그는 대화마저 의도대로 되지 않자 결국 외도라는 폭탄선언을 하게 된다. 평온했던 가정에 들이닥친 위기, 종교적 신념을 앞세워 수혈을 거부하던 소년이 운명처럼 다가온 건 바로 이 즈음이다.



재판 당시 애덤의 나이는 만 17세 9개월, 미성년이었다. 애덤에겐 아동법에 의해 보호받을 권리가 있었다. 법정에서는 애덤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수혈을 거부할 권리, 즉 존엄성을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아동법의 취지에 따라 수혈을 허락할 것인지를 놓고 양 진영 간 치열한 법리 다툼이 벌어진다. 피오나는 소년이 죽음을 자처하며 지키고자 했던 게 무언지, 소년의 복지를 위해 지금 당장 필요한 게 무언지, 이를 살피기 위해 직접 병원을 찾는다. 



'칠드런 액트(The Children Act)‘는 영국의 ’아동법‘을 일컫는다. 해당 법은 법정이 미성년자와 관련한 사건을 판결할 때 아동 복지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병원을 방문하여 소년을 직접 만난 피오나는 그에게 당장 필요한 건 복지임을 깨닫고, 병원 측에 강제 수혈 허락 판결을 내린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법과 상식, 이성에 기대어 온 그녀에겐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이후 상황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피오나의 판결은 애덤의 삶을 180도 바꿔놓게 된다. 신앙을 근간으로 하던 애덤의 믿음은 뿌리째 흔들리고, 정체성마저 큰 혼란을 겪게 된다. 그녀는 단지 아동법의 취지에 따라 판단했음에도 애덤은 그녀가 자신을 변화시켰다고 굳게 믿게 된다.  



이렇듯 누군가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은 커다란 책임감과 부담감이 수반되는 사안이다. 피오나는 이러한 중압감 때문에 늘 주말을 헌납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정에 설 때면 그 어떤 이들보다 강단이 세고 단호했던 피오나. 애덤 사건 이후 그녀의 삶을 지탱시켜온 중요한 가치들이 한꺼번에 흔들리는 미증유의 경험을 하게 된다. 



피오나는 타인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평생 업으로 삼아온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제대로 돌보지 못 해왔다. 이는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힘들게 지탱해온 법조인으로서의 자존감도 아주 조그만 충격으로 크게 휘청거린다. 자칫 모든 게 와르르 무너질 판국이다. 영화는 균형 잡힌 삶의 당위성을 이야기하고, 누군가의 삶에 관여하는 판단에는 막중한 책임감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인생의 큰 굴곡과 마주하게 된 한 중년여성. 그녀가 겪는 감정의 흐름을 섬세한 시선으로 따라가는 영화 <칠드런 액트>는 피오나로 분한 엠마 톰슨의 우아하면서도 지적인 연기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복잡하게 얽힌 가치판단 문제와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여성의 낯선 경험을 통해 일과 생활의 균형, 그리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감독  리처드 이어


* 이미지 출처 : 씨나몬(주)홈초이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