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삶 <벌새>

새 날 2020. 4. 23.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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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은희(박지후)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온통 혼란스럽다. 오로지 오빠만 위하고 딸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아빠(정인기)는 그녀를 숨 막히게 하는 존재 갑이다. 또 학교에서는 왜 그리도 하지 말라는 것투성이인지, 생활은 영 심드렁하기만 하다. 매일 학교와 집을 반복하여 오가던 은희에게 마땅히 정을 붙일 만한 곳은 없었다. 그나마 교사와 부모 몰래 벌이는 일탈 행위가 은희에겐 작은 위안이자 숨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은희가 다니던 한자 학원에 새로운 강사 한 명이 들어온다. 영지(김새벽)라 불렸다. 첫인상부터 남다르게 다가오던 그녀는 어느 누구보다 은희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은희에게도 드디어 마음을 터놓고 의지할 수 있는 상대가 생긴 것이다.


영화 <벌새>는 세상과 마주하기 위해 이제 걸음마를 막 떼기 시작한 한 여중생의 시선에 비친 세상을 이야기한다. 다양한 계층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조금씩 세상에 눈을 떠가며 벌새처럼 부지런히 날갯짓하는 은희의 모습을 스크린 위에 옮겼다. 배우 박지후가 제18회 트라이베카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배우 김새벽이 제3회 말레이시아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는 등 영화 <벌새>는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서 25관왕을 차지하며 일찌감치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은희네 가정은 성공을 위해 몸부림치는 소시민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가부장적인 아빠는 아들의 외고 진학을 위해 모든 자원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다. 이를 위해 가족 모두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자식의 성공, 그 가운데서도 특히 아들의 성공을 통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꿈꾸며 대리만족을 얻으려는 부모들의 세속적 욕망이 여느 가정들처럼 은희네 가정에도 짙게 배어있었다. 


그렇다면 학교 울타리는 어떨까. 교사는 아이들의 인성보다 진학 경쟁을 부추기기 일쑤였다. 수업 중 “서울대에 가자”는 구호를 공공연히 외칠 만큼 학교의 교육은 특정 방향으로 크게 치우쳐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심신이 짓눌린 채 살아온 은희에게 유일한 해방구는 공교롭게도 일탈이었다. 수업시간에는 잠으로 일관하고, 하교 후엔 어른 흉내를 내기 위해 클럽에서 시간을 소일하거나 이성 교제에 나서는 등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행위의 재미에 푹 빠져든다. 



은희는 친구와 이성, 그리고 후배와도 관계를 열심히 맺는 등 그녀를 둘러싼 세상과의 접촉면을 조금씩 넓혀가기 위해 노력하지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입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 그녀에게 불현듯 다가온 영지. 


은희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영지는 주변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인물이었다.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았다. 자신에겐 관심조차 없었던 가정과 학교의 어른들과 달리 그녀는 은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던 데다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은희가 영지에게 빠져들었던 이유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았다. 영지와의 관계를 조금씩 다져가던 어느 날, 평소처럼 한자 학원을 찾아온 은희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영지가 학원을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무언가 중요한 걸 잃어버린 듯한 느낌. 은희는 공허함 때문에 한동안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이즈음 그녀는 삶 전체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사건 하나와 마주하게 된다. 멀쩡하던 성수대교가 이른 아침에 맥없이 무너진 것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출근과 등교를 위해 이 다리를 건너는 중이었다.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인 1994년은 성공 지향의 삶이 정점으로 치닫던 때다. 1년 전 국내 최대 기업의 총수가 “아내 빼고 모든 걸 바꾸라”고 말한 뒤 모든 이들이 이 발언에 자극받아 줄줄이 경쟁 속으로 뛰어든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영화를 통해서도 표출된다. 어른들의 성공 열망은 아이들의 교육으로 이어져 사교육 시장이 본격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한다. 은희네 가정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한 부모의 마음은 한결같은 것일 테니 말이다. 이른바 교육 특구라 불리는 서울 강남에 일찌감치 터를 잡고 담금질에 나선다. 



극중 아이들더러 ‘날라리’ 친구를 적어내라는 등 구태의연한 교육 방식을 답습하던 일선 학교는 공교육기관으로서 본연의 책무를 내팽개친 지 오래였다. 더불어 가부장적인 주변 환경은 은희의 숨통을 옥죄어오는 기제로 작용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대다수의 가정이 그랬던 것처럼 수직적 의사소통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녀의 가정. 아빠는 유독 장남에게만 관대한 모습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대물림되어 은희에게 작지 않은 영향력으로 다가온다. 



은희를 둘러싼 주변 환경은 무엇 하나 녹록한 게 없었고, 사람들과의 인연은 왜 그리도 쉽게 어긋나거나 상처를 안겨주는 것인지. 유일하게 위안이 되어주던 관계조차도 의도대로 흘러가는 법이 결코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작 중학생에 불과한 은희에게 다가온 전대미문의 사건, 성수대교 붕괴사고. 이는 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생채기를 남긴 사건이자 폭주하는 우리 사회에 던져진 일종의 경고장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가부장적인 환경 속에서도 지혜롭게 맞서 싸워왔듯이, 틀어진 관계 속에서도 이를 하나하나 극복하며 세상을 배워왔듯이, 충격적인 사건 속에서도 결국 이를 어떻게든 이겨내고 묵묵히 살아가야 하는 삶임을 터득하게 되지 않을는지. 


우리는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대변되는 1994년을 열심히 관통해오고, 또 이후로도 벌새처럼 1초에 19~90번의 날갯짓을 통해 꿀벌보다 더욱 부지런히 움직이며 성장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은희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감독  김보라


* 이미지 출처 : (주)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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