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현대인들에게 작은 위로를.. 영화 '버티고'

새 날 2020. 6. 18.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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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기업체 디자이너로 근무 중인 서영(천우희). 그녀는 같은 회사 직원 진수(유태오)와 사내 연애 중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비밀리에 이뤄졌다. 업무적으로 유능한 데다 외모까지 출중하여 여직원들에게 훈남으로 통하는 인물 진수. 그런 그와 연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서영은 내심 뿌듯했다. 유일한 흠이라면 주변인들에게 그와의 관계를 떳떳이 드러낼 수 없다는 점 정도. 


그래서일까. 진수를 바라보는 서영의 눈에선 언제나 꿀이 뚝뚝 떨어진다. 진수와 함께하는 공간에서 같이 호흡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서영에겐 늘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와의 관계가 근래 부쩍 불안해졌다. 미묘한 틈새가 감지된다. 어쩐지 둘의 관계가 지속될 수 없을 것 같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분명 진수가 서영과의 만남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눈치다. 급기야 해외 출장을 다녀온 어느 날, 진수는 회사에 돌연 사직서를 제출한다. 근래 서영에게 왠지 냉담했던 것처럼 그녀와 사전 교감 같은 건 일절 없었다. 지금 서영에게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걸까.



영화 <버티고>는 한 여성 직장인의 사랑 이야기다. 그 이면에는 일상을 불안케 해온 기제들이 얽히고설킨 채 들러붙어 그녀의 삶 전반을 옥죄어오는 현상이 자리하고 있다. 관계에 상처받은 여성. 그녀는 다행히 또 다른 관계에 눈을 뜨고 그에 의해 치유 받는다. 감독 특유의 감성적인 연출 덕분에 배우 천우희의 매력이 더욱 도드라지는 작품이다.


진수를 향한 서영의 사랑은 일방적이었다. 지나친 비대칭의 관계다. 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어긋나리라는 건 누구든 짐작 가능한 것이었다. 주도권을 쥔 그에게 줄곧 끌려 다니던 서영. 결국 헤어질 때에도 그의 일방적인 의사표시로 모든 게 정리되는 수순을 밟고 만다. 



이렇듯 진수와의 이별로 서영이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할 즈음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몰래 지켜보던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고층빌딩 청소 노동자 관우(정재광)였다. 밧줄에 몸을 의지한 채 사무실 창을 닦을 때마다 공교롭게도 근무 중이던 서영의 모습이 관우의 시선에 포착됐던 것이다. 



관우와 서영의 물리적인 거리는 얼마나 될까. 기껏해야 수 미터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가 서영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첨단시설로 꾸며진 사무실은 일개 용역회사에 소속된 그의 접근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덕분에 서영을 향한 관우의 마음은 늘 외벽에 의지한 채 창문을 통해 전달되곤 했다. 관우와 처음 눈이 마주쳤을 당시 서영은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엔 혼란스러운 감정 상태에 놓였던 터라 솔직히 관우에게까지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고층빌딩 위에서 밧줄 하나에 의지한 채 구애하던 관우의 끈질긴 노력에 그녀는 결국 마음의 빗장을 스르르 풀게 된다.


초고층빌딩이라는 공간적 배경. 그 위에 아름다운 음악과 감각적인 영상을 덧입힌 감성적인 사랑. 그런데 이 영화를 이렇게만 표현한다면 어쩐지 서운할 것 같다. 서영의 사랑 이면에는 그녀의 삶 전체에 깃든 불안이 자리하고 있고, 그와 관련한 비판 의식이 짙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서영의 삶은 불안감으로 점철돼 있다. 불안의 근원은 무얼까. 그녀는 늘 재계약 압박에 시달리는 계약직 신분이다. 정규직 중견간부였던 진수와의 관계에서 줄곧 약자로 질질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던 건 다름 아닌 이로부터 기인한다. 사내에서는 재계약을 빌미로 온갖 종류의 차별과 갑질이 횡행했고, 서영 역시 이러한 굴레와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였다. 



가정폭력을 일삼던 아버지 때문에 어릴 적 생긴 귓병은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이명과 두통에 그녀의 육신은 지칠 대로 지쳐 이미 임계치에 다다른 느낌이다. 이런 상황에서 죽 끓듯 변덕을 일삼는 엄마의 히스테리를 모두 받아주고, 흔들리는 연애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녀다.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참는 등 오직 버티고 또 버티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하루하루를 버티기가 쉽지 않은 일상 속에서 서영은 술집 ‘버티고’에서 진수와 만나는 게 낙이었는데, 그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이젠 그마저도 불가능해졌다. 


버티고 버티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게 된 서영. 그녀 앞에 불쑥 나타난 관우. 건물 외벽에 매달려 창문을 청소하면서 그가 삶에 지쳐 우울감에 빠진 서영에게 “힘내세요”라는 문구를 써 보이던 순간, 눈물을 왈칵 쏟는 서영의 모습을 통해 관객들 또한 그녀와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서영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현대인들, 오늘도 버티고 또 버티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영화 <버티고>는 작은 위안이 되어준다.



감독  전계수   


* 이미지 출처 : ㈜트리플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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