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적당히 살아도 괜찮아 '걷기왕'

새 날 2019. 9. 11.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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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자동차 등 탈것을 탈 때마다 심한 멀미를 앓곤 했던 만복(심은경). 어느덧 고등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되었으나 해당 증상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걸어서 두 시간 거리에 위치한 학교를 꼬박 네 시간에 걸쳐 도보로 왕복하는 생활을 택한다. 성격이 워낙 느긋한 데다 등하교하면서 에너지를 모두 쏟아 부은 탓에 만복은 늘 피곤에 절어 지내야 했다. 특별히 목표로 정해놓은 꿈도 없었고, 지겨운 수업시간만 되면 책상 위에 엎어져 자는 게 그녀의 일상이 돼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담임선생님(김새벽)과 상담을 하게 된 만복은 그녀로부터 대뜸 육상 선수가 되어보는 건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는다. 그다지 특별할 게 없어 보였던 만복이었지만 멀미 때문에 네 시간을 꼬박 걸어서 등하교한다는 놀라운 사실에 담임선생님의 귀가 솔깃해진 것이다. 담임선생님은 그 정도의 끈기와 근성이라면 육상계에서 충분히 두각을 나타낼 수 있으리라 장담했다. 그렇게 하여 만복은 학교 육상부에 몸을 담그고, 곧이어 경보 선수가 된다.



영화 <걷기왕>은 선천성 멀미증후군을 앓으며 꿈도 희망도 없이 시계추처럼 학교와 집만을 오가던 한 소녀가 우연한 기회에 학교 육상부에 들어가 경보선수가 되어 활약하면서 점차 성장해간다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엉겁결에 들어가게 된 만복의 육상부 활동은 학급에서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재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하여 특별히 흥미를 갖고 있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소녀에 불과했던 만복은 또 다시 그럭저럭 생활하게 된다.



하지만 만복과 함께 경보 선수로 활약 중인 선배 수지(박주희)는 남다른 인물이었다. 부상 때문에 현재 주춤하고 있으나 부상 이전까지만 해도 학교는 물론, 육상계에서도 내로라하는 뛰어난 선수였다. 그녀의 눈에 만복이 탐탁지 않게 다가오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그녀는 매사를 설렁설렁 넘기거나 대충하려는 만복의 태도를 질타했다. 자신처럼 목숨을 걸고 해도 될까 말까 한 상황에서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살아가는 듯한 만복의 일거수일투족이 짐짓 못마땅했던 것이다.

선천성 멀미증후군으로 인해 장거리 이동이 애초 불가능한 만복. 그녀 앞에 놓인 수많은 장애물들을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뛰어넘거나 과감히 걷어내고, 만복은 과연 세상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갈 수 있을까?



우리가 사는 곳은 지나치게 노력을 강요하는 세상이다. 모두가 열정을 요구하며 목숨을 걸고 덤벼들라고 조언한다. 어디를 가도 간절함과 열정만이 살길이라며 한결같은 목소리만 있을 뿐이다. 열정과 패기만 있다면 세상 못 할 일 없다며 너도 나도 열정 전도사가 되어 한 마디씩 거든다. 가뜩이나 쉼 없이 돌아가는 바쁜 세상이거늘, 언젠가부터 약간의 쉼이나 여유조차 죄악처럼 받아들여지는 게 현실이다.

만복의 담임선생님 역시 열정 전도사를 자처해온 인물이다. 이 영화에서는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녀는 자기계발서를 신봉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담당하는 학생들에게 늘 열정과 꿈을 가지라며 힘주어 말한다. 공무원이 꿈이라는 만복의 짝꿍에게는 보다 원대한 꿈을 목표로 가지라며 채근하고, 아무런 꿈조차 꾸지 않는 만복에게는 단순히 잘 걷는다는 이유만으로 육상선수의 꿈을 몸소 심어준다.



왜 소박한 꿈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이냐고 묻는 학생에게는 기성세대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그저 ‘열정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는 식의 매크로 같은 답변만을 주구장창 늘어놓는 담임선생님이다. 만복은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육상 선수가 되었고, 아울러 담임선생님의 열정 이론을 철석 같이 믿고 트랙 위를 열심히 걷거나 뛰어보지만, 이 길이 과연 자신의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투성이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행복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게 그녀에겐 가장 뼈아프다.

이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던 백승화 감독은 “기성세대가 청춘들에게 요구하는 ‘패기’, ‘열정’, ‘간절함’과 같은 이야기가 무책임하다고 느꼈다. 꿈이 없어도 괜찮고, 적당히 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여전히 구조적인 모순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열정, 노력, 패기만 가지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노라는 주장은 허무맹랑하고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소리이다. 열정을 갖지 않고 굳이 노력을 기울이려 하지 않는 것 역시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성격이 제각각인 것 마냥 혹은 취향이 다르듯이 존중해주어야 마땅하다.

만복의 짝꿍이 공무원이 되어 동사무소에서 하루 종일 등본만 떼어주는 게 자신의 꿈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를 존중해주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조용히 응원해주면 그만이다. 만복이 육상대회에 경보 선수로 출전하여 순위권에 들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걷지 않고 자신의 천성대로 설렁설렁 걸으며 그 시간을 만끽하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저 박수를 쳐주면 그만이다.

누군가는 열정을 쏟지 않는 게 되레 행복하단다. 이러한 그만의 살아가는 방식을 두고 패기와 열정이 부족하다느니 왜 노력하지 않느냐는 주장은 지나친 오지랖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열정을 쏟아 부을 자유가 있다면, 그와 반대로 열정을 쏟지 않을 자유도 허락되어야 한다. 적어도 강요하지는 말자.

우리 이제 이렇게 말해보는 게 어떨까? 적당히 살아도 괜찮다고. 꿈이 작으면 좀 어떻냐고.
만복의 성장을 응원한다.



감독  백승화 


* 이미지 출처 : 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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