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오롯이 희생할 수는 없다 '소공녀'

새 날 2019. 3. 21.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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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도우미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미소(이솜)는 월세방을 전전하는 처지이다.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쥐꼬리인데 그녀가 즐겨하는 담배의 가격은 최근 두 배 가까이 껑충 뛰었다. 모든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상황에서 월세라고 하여 얌전히 있을 리 만무했다. 때마침 방주인이 월세 인상을 알려왔다. 미소는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려본다. 하지만 그렇게 한들 수입은 고정돼있고 물가는 끊임없이 오르는 상황에서 뾰족한 대안을 찾기란 어려운 노릇이었다.

 

미소는 결단을 내려야했다. 자신의 기호품인 담배와 위스키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기에 결국 집을 포기하기로. 이때부터 미소의 뜻하지 않은 도시 속 난민 생활이 펼쳐진다. 과거 대학 시절 함께 밴드를 운영했던 멤버들을 하나둘 찾아다니면서 잠자리 구걸에 나선 것이다.

 

영화 <소공녀>는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자신의 취향만큼은 절대로 물러설 수 없었던 가사도우미 미소가 과감히 집을 포기하고 잠자리를 위해 지인들을 찾아다니면서 겪게 되는 에피소드를 그린 작품이다.

 

 

담배와 위스키를 위해 집을 포기한 미소

 

이 영화는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CGV아트하우스상과 제43회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했다. 아울러 CGV아트하우스 '2018 올해의 독립영화'에 선정됐으며, 제41회 예테보리국제영화제에 초청되는 등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영화에서 미소는 비록 가난하지만, 소신 있는 캐릭터로 그려져 있다. 그녀는 가진 돈이 없어 마땅한 거처를 구하지 못하고, 짐을 싸든 채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어 공중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거나 손 건조기에 머리를 말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는 어디에서건 당당함을 잃지 않는, 매력 덩어리 캐릭터였다.

 

한편 미소의 남자친구 한솔(안재홍) 역시 미소만큼이나 가난한 청년이었다. 그는 학자금 대출 빚을 떠안은 채 사회에 진출,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던 참이다. 때문에 남들처럼 맛집을 찾아다니는 등 평범한 데이트 따위는 이들에게는 언감생심이었다. 공짜 영화 티켓을 얻기 위해 헌혈차에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의 처량한 모습은 작금의 현실이 얼마나 딱하고 고달픈 종류의 것인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래도 미소가 한솔을 좋아하는 건 그가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웹툰 작가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결코 멈추지 않는, 뚜렷한 소신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소는 그러한 한솔을 자신의 일처럼 곁에서 늘 응원하고 격려해주었다. 이렇듯 두 사람은 각자의 취향과 가치관 그리고 꿈을 소중히 간직한 채 차가운 도시 위에서 전쟁처럼 치열하고 힘겨운 삶을 영위해나가고 있었다.

 

미소는 비싼 월세로 인해 집을 포기하고 스스로 난민을 자처하는 바람에 당장 잠자리가 급선무였다. 이를 위해 그녀는 학창 시절 당시 함께 밴드 활동을 했던 동료들을 찾아 나선다. 이들 캐릭터는 무척 다양하고 엉뚱한 구석이 있는 데다 흡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싶어 생생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캐릭터뿐 아니라 이들의 살아가는 유무형의 환경 역시 세상의 축소판이라 할 만큼 다채로운 것이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오롯이 희생하지 않겠다’

 

전고운 감독은 “담배를 사랑하고 있거나 한때 담배를 사랑했던 사람들, 월세가 없어도 술을 마시는 사람들, 하고 싶은 일을 하느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춥고 지독한 서울에서 만난 게 그래도 반갑다는 말이 하고 싶어서 이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며 연출 의도를 밝혔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의 미소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결핍을 호소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등 따스한 존재로 다가온다. 

 

미소가 집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담배와 위스키 그리고 한솔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결정에 젊은이들이 환호하는 건 다름 아닌 미래를 위해 현재를 오롯이 저당 잡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자 근래 떠오르고 있는 가치 소비, 즉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는 요즘 젊은 세대들의 소비 행태가 발현됐기 때문이다. 

 

근래 청년세대는 ‘N포세대’로 불린다.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 청년들로 하여금 연애는 물론 결혼과 출산 그리고 인간관계 등 모든 걸 포기하거나 단절시키도록 만들고 있다. 미소와 한솔 커플이 전형적인 사례다.

 

 

밴드 활동 당시 기타를 연주했던 정미(김재화)는 그녀를 찾아온 미소를 향해 어이없다는 듯 한 표정을 짓는다. 집을 포기하고 그 대신 비싼 담배와 위스키를 선택한 미소의 철없는(?) 행동 때문이다. 심지어 “한심하다”고까지 말한다. 이는 이른바 ‘꼰대’라 불리는 기성세대의 보편적인 시각을 정미가 대변했던 것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는 진정 자신의 가치를 높인다고 생각하는 행위, 즉 내일을 위해 오늘을 오롯이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소신만큼은 끝내 굽히지 않는다. 비록 아르바이트와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힘겨운 삶이라 할지라도 현재를 열심히 즐기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미소의 이러한 당당함이 아마도 젊은이들로 하여금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고 위안으로 다가오도록 했던 게 아닐까 싶다.

 

 

감독  전고운

 

* 이미지 출처 : 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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