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각기 다른 욕망을 좇는 세 사람의 폭주 '우상'

새 날 2019. 3. 19.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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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출장을 마치고 귀국한 도의원 구명회(한석규), 그의 앞으로 아내의 무수한 부재전화가 남겨져있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한 그는 부리나케 집으로 향한다. 이윽고 집에 도착한 그의 눈앞에는 깜짝 놀랄 일이 벌어져있었다. 아들 녀석이 뺑소니사고를 저지른 것이다. 그는 아들로 하여금 경찰에 자수를 시켜 사건을 수습하려고 시도한다.

한편 구명회 아들의 뺑소니사고로 아들 부남을 잃은 유중식(설경구)은 절망감에 어쩔 줄을 몰라해한다. 아들의 사건 당일 행적과 죽음을 석연치 않게 판단한 그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아들과 함께 있다가 사라진 며느리 최련화(천우희)를 찾아 수소문하기 시작한다.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잃은 애비의 고군분투는 눈물 겨운 것이었다.

각기 다른 우상을 좇는 세 사람의 폭주

영화 <우상>은 아들의 뺑소니사고로 자신의 정치 인생에 있어 최악의 위기를 맞은 고명회, 목숨처럼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죽자 이의 진실을 찾아 직접 나서는 유중식, 그리고 사고 당일 비밀을 간직한 채 사라진 최련화가 각기 욕망을 좇아 폭주하는 이야기를 그린 스릴러 장르의 작품이다.



이 영화는 제69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파노라마 섹션에 공식 초청되는 등 올 상반기 최고의 화제작으로 꼽힌다.

영화에서 구명회는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겉으로는 늘 반듯한 태도를 견지해온 그였기에 대중들에게도 비슷한 이미지의 정치인으로 각인돼있던 참이다. 별 다른 정치적 기반이 없는 일개 도의원에 불과한 그였으나 이러한 그만의 대중적인 이미지가 소중한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아들의 뺑소니사고로 절체절명의 정치적 위기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직해 보이는 자세와 겸손한 태도는 되레 위기를 기회로 다가오게 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명회의 이미지는 권력을 쟁취하려는 집단에게는 매우 훌륭한 먹잇감으로 다가왔다. 누가 뭐라 해도 구명회는 차기 도지사로서 유력 후보감이었다.

하지만 구명회의 인물 됨됨이는 뺑소니사고를 처리하는 과정과 그의 아들 및 아내의 언행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여타 정치인들의 평소 시선을 통해서도 이를 가늠케 한다. 이후 명예와 권력이라는 욕망, 아니 우상을 좇는 구명회의 어긋난 선택과 뒤이은 폭주는 상당히 섬뜩하다.

유중식은 집요했다. 그만큼 아들을 향한 사랑이 남달랐던 탓이다. 자식을 잃은 억울함과 비통함은 그의 끈질긴 진실 추적으로 이어지게 하는 원동력으로 다가온다. 아들 부남의 죽음이 뺑소니사고로 판명이 나고 그에 따른 후속 조치들이 취해졌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은 여전했다.



144분간의 폭주 뒤 남는 건 ‘허탈감’, 알아들을 수 없는 대사는 ‘옥에 티’

경찰은 이러한 의혹을 일일이 해소해주지 않았다. 아울러 세상은 그의 말에 전혀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그가 호소하는 억울함은 허공으로 흩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결국 그는 내면에 분노를 꽁꽁 감싸 안은 채 직접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폭주한다. 유중식을 폭주에 이르게 한 원동력은 구명회의 그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유중식의 아들 부남이 사고를 당하던 날, 최련화는 사고 현장에 부남과 함께 있다가 감쪽같이 사라진 의문의 인물이다. 누군가에게는 결코 밝혀져서는 안 될 비밀, 반대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밝혀져야 할 진실을 안고 있던 최련화를 구명회와 유중식은 각기 다른 목적으로 뒤쫓기 시작한다. 그녀가 좇는 우상은 오로지 생존이라는 가장 절박하면서도 근원적인 욕망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다. 



144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함을 느낄 겨를이 없을 정도로 몰입감이 뛰어난 작품이다. 섬세한 연출력 덕분인지 특히 극의 초반 긴장감은 상당했다. 시선이 스크린 속으로 절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연기파 배우들답게 배우들의 연기는 흠 잡을 데가 없었다.

다만, 대사를 알아들을 수 없었던 몇몇 장면들은 ‘옥에 티’였음이 분명하다. 아울러 인물의 속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였겠으나 ‘15세 관람가’ 등급에는 다소 과해 보이는 잔혹하고 선정적인 장면들도 다수 등장한다.

극은 주어진 상황에서 인물들이 각기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몹시 출렁거렸다. 한 마디로 혼란스러웠다. 상징적인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한 뒤 관객 각자에게 해석을 맡겨놓은 탓인지 친절하지도 않았다. 초반의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살짝 남는다. 명예와 권력, 진실 그리고 생존이라는 각기 다른 욕망을 좇는 이들의 144분 동안의 폭주를 관람한 뒤 남는 건 가쁜 숨과 함께 왠지 모를 허탈감이었다. 감독의 노림수라면 나름 성공을 거둔 셈이다.



감독  이수진


* 이미지 출처 : 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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