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박항서 신드롬의 실체를 파헤쳐보자

새 날 2018. 12. 15.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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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신드롬이다. 박항서 신드롬이 분다. 베트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나라도 그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베트남 현지에서는 15일 결승 2차전 텔레비전 광고료가 축구중계 사상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4만여 명을 수용 가능한 베트남 미딘 국립경기장은 만원이 예상되는 가운데 벌써부터 암표상이 극성을 부린다고 한다. 표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베트남이야 축구 경기를 치르는 당사자이기에 이러한 결과가 충분히 납득이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부는 베트남 축구 열풍은 과연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한 케이블 방송사가 중계한 스즈키컵 결승 1차전 시청률은 4.7%로 올해 케이블에서 중계한 스포츠 프로그램 중 최고를 기록했단다. 놀랍다. 급기야 결승 2차전을 지상파에서 생중계하기로 결정했단다. 그것도 인기리에 방영 중이던 주말 드라마를 멀찌감치 밀어내고서 말이다,


ⓒOSEN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의 결승 1차전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베트남 선수가 두 번째로 차 넣은 골은 말 그대로 환상이었다. 골 지역 밖 10미터라는 꽤 먼 거리에서 찬 공은 멋진 아치를 그리며 거짓말처럼 골대 그물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가고 만다. 더구나 골을 넣은 선수는 공을 차는 순간 몸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바닥으로 넘어지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은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의 상단 오른쪽 구석을 절묘하게 파고 들어간 것이다. 말레이시아 골키퍼가 날아오는 공의 방향을 재빠르게 읽고 해당 방향으로 몸을 날렸으나 공은 이미 잡을 수 없는 위치로 향했다. 비록 두 골을 먼저 넣은 뒤 뒷심 부족으로 연거푸 두 골을 허용하며 경기를 무승부로 마무리 지었지만, 이렇듯 시원시원한 박항서표 공격 축구가 아마도 베트남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박항서의 인기 요인은 무엇일까? 물론 이번 스즈키컵 대회뿐 아니라 박항서 감독이 부임한 이래 베트남 축구 수준을 적어도 몇 단계는 끌어 올린, 이른바 '박항서 매직'으로 한국 사람들로 하여금 베트남 축구에 대한 관심을 부쩍 키운 건 엄연한 사실이다. 게다가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이 붉은 유니폼을 입고 운동장을 누비는 모습은 왠지 낯 설지가 않다.


ⓒOSEN


그뿐 만이 아니다. 베트남 축구가 기록을 하나하나 새로 써 내려갈 때마다 경기장 관중석에는 베트남 국가대표팀 유니폼과 똑같은 색깔의 붉은 옷을 입은 관중들로 가득 들어차 열띤 응원전을 펼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16년 전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박항서 감독은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과 함께 4강 신화를 쏘아 올린 주역 가운데 하나다. 때문에 그가 '쌀딩크'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시 한국 축구가 쏘아 올린 기적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전 국민을 붉은 악마로 만들어 경기 때마다 거리 위로 쏟아져 나오도록 했으니 말이다.



축구 강국들과 벌이던 매 경기는 한국 축구의 새로운 신화를 써 내려가는 기폭제였으며, 온 국민은 사상 유례 없는, 스포츠를 통한 축제의 기쁨을 온몸으로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가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이전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2002년 월드컵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경우는 군사독재의 불의에 맞서 시위를 벌일 때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구라는 스포츠가 마침내 대한민국 국민을 한 마음 한 뜻으로 묶고, 모두를 축제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 넣었다. 이러한 기적을 만든 장본인이 다름 아닌 박항서 감독이다. 그는 베트남으로 건너가 한국에서 만든 기적을 재현 중이다.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 모습


한국 사람들은 베트남 국민들이 붉은 옷을 입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열광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연스레 2002년 당시 거리 위에서 응원전을 펼치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테다. 2018년의 한국 축구는 아쉽게도 16년 전의 기적에 견줄 만한 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단 한 차례의 놀라운 기적 탓에 기대감이 부풀려진 만큼 도리어 실망감만 더욱 크게 다가온다. 더구나 서민 경제는 그 어느 때보다 어렵다고 한다. 불황이 깊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가장 좋았던 시절인 2002년 당시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건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박항서 감독과 베트남 축구를 통해 추억을 소비하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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