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찹쌀떡~" 하면 조건반사처럼 떠오르는 추억

새 날 2018. 12. 13.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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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찹쌀떡~"


문밖에서 반가운 소리가 들려온다. 본격적인 겨울로 접어드는 이맘때쯤이면 집 주변에서 간혹 들을 수 있는 소리다. 터치 한 번으로 집까지 웬만한 음식들을 배달시켜 먹는 이 편리한 세상에, 아직도 한 쪽 어깨에 떡을 짊어진 채 자신의 존재감을 외치며 떡을 판매하러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어쩌면 놀랍고도 반가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방식으로 찹쌀떡을 판매하는 분들이 제법 된다. 아마도 수요가 있기 때문일 텐데, 지금은 대부분 뒤로 밀려난 20세기형 문물에 대한 향수나 추억을 떠올리면서 구입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추억을 소비하는 아이템이라고 할까.


20세기말 이전에 태어난 이들이라면 대부분 비슷하겠지만, 나 또한 찹쌀떡에 얽힌 추억이 있다. 그런데 웃긴 건 소비자의 입장이 아닌 판매자의 입장에서였다. 어릴 적, 그러니까 국민학교에 다닐 때였던가 보다. 한동네에 사는 형이 아르바이트로 찹쌀떡 판매를 시작했는데, 나더러 함께 가잔다. 난 별다른 고민 없이 흔쾌히 그러마 했다. 아마도 호빵 따위의 간식거리에 홀라당 넘어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얼척없다.


ⓒ경향신문


어쨌든 난 찹쌀떡을 짊어진 형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어찌나 추웠던지 손과 발이 꽁꽁 얼어 붙고 귀마저 떨어져 나갈 듯한 매서운 한파가 불어닥친 날이었다. 하지만 매상은 신통치 않았던 걸로 기억된다. 한 개도 팔지 못했던 것 같다. 해는 왜 그리도 짧던지 어느덧 뉘엇뉘엇 넘어가는 찰나였다. 기온은 더욱 떨어졌다. 그때다. 한 집에서 아주머니가 나오시더니 "어머, 어린 애가 이렇게 추운 날 떡을 팔고 다니네" 하시면서 날 바라보더니 형에게 떡 하나를 주문하는 것이었다. 물론 내 머리를 쓰다듬는 일도 잊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다지 찬한 사이도 아니었으면서 내가 왜 형을 따라 나섰던 것인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고3 때의 기억도 있다. 대학시험을 치른 뒤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한 친구 녀석이 아르바이트를 하자며 나를 꼬드겼다. 자기가 알고 있는 찹쌀떡 공장이 있는데, 거기에서 떡을 싸게 떼다가 팔자는 얘기였다. 어차피 노는 시기였고, 아르바이트를 통해 사회 경험도 쌓으며 용돈도 벌 수 있다는 나름의 구실이 성립됐다. 문제는 장사 밑천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이 또한 엄연한 사업이니 반드시 불려서 되갚겠노라 호언장담하면서 아버지에게 돈을 빌렸다. 이렇게 하여 떡 공장에 가서 찹쌀떡을 떼 왔다. 가방에 주섬주섬 넣어 어깨에 짊어진 뒤 거리로 나섰다. 그런데 "찹쌀떡~" 하고 외쳐야 나의 존재감을 알릴 수 있을 텐데, 왠지 입에서 그 소리가 잘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외쳤다. 팔릴 리가 만무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목청껏 외쳤다.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열심히 외쳤다.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없었다. 웬 젊은 애들이 저러고 다니나 하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해는 이미 넘어간 뒤다. 어둑해진 골목길 이곳저곳을 누비며 찹쌀떡을 외쳤으나 단 한 개도 팔지 못했다. 조바심이 생겼다. 그때였다. 어떤 미용실에서 아주머니가 우리를 불렀다. 젊은 청년들이 열심히 산다며 찹쌀떡 한 개를 주문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찹쌀떡이 먹고 싶어서라기보다 젊은이들이 추운 겨울에 떡을 판매하러 돌아다니는 모습이 안쓰러워 돕자는 마음에서 구입한 듯싶다.


어쨌거나 나의 거창했던 사업 계획은 결국 찹쌀떡 한 개라는 매우 초라한 실적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쉽게 말하자면 쫄딱 말아먹은 셈이다. 찹쌀떡에 얽힌 기억들을 발굴하다 보니 이처럼 실타래처럼 줄줄이 엮여 나오지만, 지금에 와서는 사실 찹쌀떡 하면 우리집 개 미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미르는 알래스칸 말라뮤트로 큰 덩치만큼 늑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견종이다. 부리부리한 외모만을 놓고볼 땐 영락 없는 맹수 같지만, 성격은 온순하기가 이를 데 없다. 순둥이도 이런 순둥이가 없다.



몸속에 늑대의 피가 흐르고 있던 미르는 다른 견종들과는 달리 하울링에 있어 탁월한 재능(?)을 뽐낸다. 특히 물건을 판매하시는 분들의 확성기가 동원될 때면 여지없다. "우웅~" 하는 그 소리는 늑대가 내지르는 소리와 흡사하다. 아울러 목청의 울림통은 또 얼마나 대단했던지, 한 번 울기 시작하면 거짓말 조금 보태 온 동네가 들썩인다. 이런 성향의 미르가 유독 좋아하는 소리가 있었으니, 바로 "찹쌀떡~" 하며 떡을 판매하러 다니는 아저씨의 목소리였다.



찹쌀떡을 판매하는 분은 주로 야심한 밤에 돌아다닌다. 그 야밤에 우리 미르가 아저씨의 목소리를 따라 하울링을 하게 되면, 아마 동네 이곳 저곳에서는 무슨 야생 동물이라도 출현한 게 아닐까 싶어 놀라는 분들이 제법 계시리라 짐작된다. 때문에 이맘때 "찹쌀떡~" 하고 외치는 소리만 들리면 사실 기겁을 하곤 했다. 물론 이마저도 이제는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어디선가 "찹쌀떡~" 하는 소리를 들으니 조건반사처럼 미르의 하울링 소리가 떠오르고, 아울러 미르의 그 늠름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지난 해까지 만해도 찹쌀떡 판매하는 분의 목소리가 늘 한결 같았는데, 올해는 다른 분의 목소리다. 물론 우리집 개 미르도 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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