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평범한 일상에 고마워해야 하는 이유

새 날 2018. 11. 19.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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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우리가 가진 고유한 색들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이제 우리가 선생님이 색을 볼 수 있도록 도울 차례다’


학생들이 들고 있는 현수막에 쓰인 글귀 내용이다. 미국의 한 고등학교 축제에서 자신들을 지도해온 선생님이 색맹임을 뒤늦게 알게 된 학생들이 용돈을 한 푼 두 푼 모아 색 보정 안경을 선물하였고, 이를 착용한 선생님이 주저 앉은 채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사연이 언론보도를 통해 전해진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색을 보고 이를 구별하는 일이 별것 아닌 사안으로 다가올지 모르나 색각이상자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단순히 색을 보고 구별해내는 평범한 일상 그 자체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다. 


색각이상자가 겪어야 하는 고충은 생각 이상으로 크다. 사회가 여러모로 발전해 오면서 그나마 지금은 과거에 비해 차별적인 요소가 많이 사라진 편이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색각이상자는 대학 진학을 할 때도 불이익을 당해야만 했다. 예술계는 차치하더라도 이과 계열에서는 수학과를 제외하고선 어떤 과의 진학도 허용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이공계열로의 진출이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었던 셈이다. 


ⓒ국민일보

ⓒ국민일보


사실 색각 이상은 색맹부터, 상대적으로 정도가 조금은 덜한 색약까지, 그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특히 색약의 경우 특정 색을 구별하는 데 있어 약간의 어려움을 느낄 수 있을지언정 평소 생활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진학과 사회 진출에는 많은 제약이 뒤따랐으며, 이를 오롯이 감수해야 했다. 가령 항공사의 승무원을 뽑을 때조차 색각이상자는 무조건 채용에서 배제됐다.


항공기 조종이나 정비 직무라면 이해가 되는 대목이지만, 승무원이라는 직무가 왜 색각이상자의 경우 진출이 허용되지 않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색각 이상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온전하게 열린 세상이 색각이상자에게는 대략 절반가량만 열려 있는 듯한 억울한 느낌으로 다가오기 일쑤다. 이렇듯 한 사람이 자신의 꿈을 펼치고 역량을 발휘하는 데 있어 우리 사회가 지닌 아량은 지나치게 빈약한 종류의 것이었다. 



더구나 이해할 수 없는 건 진학이나 사회 진출에는 이토록 까다롭게 색각이상자의 문호를 막아놓고선 정작 군입대, 그것도 훈련이 고되기로 소문이 난 특공대 등의 차출 시에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알 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특공대는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려야 하는 공수 훈련이 필수다. 승무원처럼 항공기 탑승이 아주 자연스럽다는 의미다.


어쨌거나 기술의 발전은 놀랍다. 필요가 발명을 촉발시킨다더니 서두에서 언급한 사례처럼 색각이상자의 고충을 잠재울 만한 제품이 등장한 것이다. 유전자 이상인 색각 이상은 선천적으로 발생하는 탓에 현재까지 치료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근시나 원시를 교정하기 위해 안경을 착용하듯이 이제는 색을 볼 수 없거나 이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도 안경 착용을 통해 이러한 고충을 조금은 덜 수 있게 됐다. 대표적인 제품이 바로 미국의 엔크로마((EnChroma)사가 개발한 안경이다.


ⓒShutterstock


이 안경은 빛의 파장을 차단하는 필터를 채용, 인위적으로 색의 경계를 구분 짓고 신경세포가 색을 서로 다르게 인지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특히 적록색맹에 큰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실내에서는 사용이 불가하며, 보라색은 구분하기 힘들다는 단점을 지녔다. 



그밖에 컬러뷰(ColorView)사가 선보인 색 보정 안경에는 색약자에게 결핍된 색의 빛은 많은 양을 투과시키고, 과도하게 반응하는 색은 적은 양을 투과시켜 색을 보정하는 원리가 적용돼 있다. 덕분에 각기 다른 용도로 개별 맞춤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지녔다. 물론 단점도 있다. 안경의 작동 원리를 통해 짐작 가능하듯이 적색과 녹색의 중간 계통인 노란색 등에 대해서는 세밀한 보정이 어렵다. 


EnChroma 홈페이지 영상 캡쳐


여성으로부터 건네받은 안경을 쓴 남성이 "오 마이 갓"을 외친다. 무엇이 보이느냐는 여성의 질문에 남성은 놀라면서 “전혀 다른 세상”이라고 말한다. 색각이상자를 위한 색 보정 안경을 개발한 한 회사의 홈페이지에 등장하는 영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온전하게 색을 보고 구별하는 건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인 까닭에 일상을 통해 특별한 감흥을 얻기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토록 평범하기 짝이 없는, 지극히 당연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그 자체로 감동으로 다가오곤 한다. 서두에서 사례로 든 것처럼 미국의 고등학교 선생님이 학생들로부터 선물로 받은 안경을 쓰고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을 경험함과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주저 앉으며 눈물을 훔쳤듯이 온전하게 색을 본다는 그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평범한 일상에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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