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진작 할 걸 그랬어

새 날 2018. 11. 8.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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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아나운서에서 책방 주인으로, 다시금 작가로 거듭난 김소영, 그녀가 MBC에 입사한 건 지난 2012년의 일이다.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간판 뉴스 진행을 꿰차는 등 승승장구하게 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녀의 모습은 시청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자처하던 방송국 경영진의 눈밖에 나는 바람에 방송 출연 금지 조치를 당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무실 책상에 앉아 그녀가 하루종일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원래부터 책을 좋아했고 책읽기가 습관이었던 사실이 그나마 위안으로 다가왔다. 반 강제적으로 회사 도서관을 들락거리는 신세가 돼버린 것이다. 덕분에 그토록 좋아하던 책만큼은 원없이 읽게 됐다. 책이 존재했기에 당시의 고통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분위기는 점점 그녀를 고립시키며, 옥죄어왔다. 결국 방송국을 나갈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린 것이다. 카메라 앞에 서서 방송을 주도적으로 이끌던 한 사람으로서, 더구나 메인 뉴스까지 진행하던 한 사람으로서 방송 출연을 정지당한 채 사무실 한쪽 귀퉁이로 내몰린 현실은 참담함 그 자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토록 어렵다고 하는 관문을 차례로 뚫고 비로소 자신의 날개를 활짝 펴려던 찰나, 외력에 의해 양 날개가 강제로 꺾인 셈이니 그로 인한 충격은 어마어마했을 테다. 그녀의 표현 대로 그나마 책이라는 존재가 없었더라면 한시도 버티기 힘들었던 나날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 책은 그녀에게 어떤 존재로 다가왔을까? 본의 아니게 긴 시간을 때워야 하는 상황에서 때로는 픽션이라는 상상의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 적당히 시간을 벌게 해주었을 테고, 자신의 처지를 위로 받고 싶은 상황에서는 헛헛해진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내용의 책을 통해 위안을 구했을 줄로 믿는다. 책이란 이렇듯 신통방통한 존재다.



그런 그녀가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책을 좋아했고 책읽기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그녀가 방송국을 그만두고 떠난 일본 여행길에서 유명한 독립 책방들을 두루 살피며 섭렵한 끝에 독립 책방을 덜컥 차린 것이다. 이 책 '진작 할 걸 그랬어'는 남편 오상진 아나운서와 함께한 일본의 책방 탐방기와 직접 차린 독립 책방 '당인리책발전소'의 창업 과정에 얽힌 이야기 및 소회가 담겨 있다.


참고서 등을 판매하며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동네 서점들이 언제부턴가 하나둘 사라져갔다. 대형화되어가는 업계의 추세와 인터넷 주문이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동네 서점들은 점차 설 곳이 마땅치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최근 각기 특색을 지닌 독립 책방이 이곳저곳에 터를 잡으면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물론 이러한 문화 또한 일본이 우리를 월등히 앞서 있다. 다른 영역도 그렇지만 특히 이런 분야만큼은 일본이 유난히 발달해 있다. 오타쿠적 기질이 강하여 그런 걸까?


특화된 분야의 도서만을 판매하는 책방부터, 오로지 한 종류의 책만을 고집스럽게 판매하는 책방까지, 그 종류나 숫자를 일일이 헤아리기란 쉽지 않을 만큼 굉장히 다양하다. 업종의 융합 방식도 상상을 초월한다. 책과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업종과 과감히 합종연횡하며 상생을 시도한다. 책과 관련한 굿즈를 개발, 함께 진열하여 판매하거나 책속 글귀 중 대중들을 확 휘어잡을 만한 내용을 메모지 등에 정성껏 적어 눈길을 사로잡는 건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다. 단순히 책만 판다기보다 작가 초대 강연이나 문화 행사 등 해당 지역의 문화 예술 허브로서의 역할도 자임하고 나섰다.



이렇듯 책방의 변신은 끝이 없다. 갈수록 텍스트와 거리가 멀어져가는 디지털 세대, 책을 판매하려는 기법 역시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에 걸맞게 고도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에도 최근 비슷한 붐 같은 게 일고 있다. 작지만 각기 개성 강한 책방이 여기저기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발길과 눈길을 모은다. 물론 책을 팔아 큰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애시당초 책방 주인들이 지닌 가치관과는 거리가 먼 개념일지도 모른다. 생존 여건이 워낙 만만찮은 까닭에 특별한 소명 의식 없이 책방을 덜컥 열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기 때문이다. 


배금주의가 팽배한 세태 속에서 그래도 돈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존재하며 기꺼이 이를 추구하겠노라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는 건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김소영 아나운서, 아니 작가, 아니 책방 주인 역시 비슷한 고민을 거듭한 끝에 책방 문을 열었다. 커피도 마실 수 있도록 한쪽에는 머신을 들여놓는 등 북카페처럼 꾸며놓았고, 사심 가득한 그녀만의 감각으로 정성껏 큐레이션된 책들을 쭉 전시해놓고 있다. 그녀가 책 위에 직접 써서 붙인 메모 역시 독특한 컨셉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직접 책방을 운영해보니, 카운터에 앉아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무거운 책 상자를 옮기고 정리하며 하루종일 분주하게 움직여야 하는 현실적인 어려움과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다. 하지만 이러한 처지 속에서도 그녀는 비록 힘은 들지언정 그동안 책을 통해 자신이 성장해온 만큼 앞으로도 책이 우리의 삶을 견인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될 것이라는 나름의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는 의외로 다음과 같은 소리가 절로 나온다.


"진작 할 걸 그랬어."


'당인리책발전소'의 인기는 상당하다. 아마도 그녀의 개인적인 인지도가 그렇게 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 책방을 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아붓고 고민을 거듭했는지는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적어도 책과 관련한 소명 의식만큼은 어느 누구보다 투철한 그녀다. 출세와 성공 앞에서 정의 따위는 깡그리 무시되는 세상, 그리고 돈의 가치가 모든 것을 압도하고도 남는 세상, 이러한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소중한 가치를 지켜내려는 가슴 따듯한 이들이 존재하기에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한 곳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평생 꿈이자 염원이었던 일을 그만두고 그녀 스스로 방송국을 걸어나오면서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순간, 오만 가지 상념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을 것으로 짐작되게 하지만, 앞으로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더라도 후회 속에서 허우적대기보다는 그 길 위에서 꿋꿋이 버티면서 기필코 행복을 찾겠노라며 과감히 책방 문을 연 그녀의 결단을 나는 응원한다.



저자  김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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