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사이코패스와 열혈형사의 치밀한 심리극 '암수살인'

새 날 2018. 10. 5. 12:41
반응형

부산 자갈치시장, 살인범 강태오(주지훈)가 체포되던 그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그는 자기 전담 형사도 아닌 마약반 김형민(김윤석) 형사에게 이번 살인 혐의까지 포함하여 모두 7건의 살인 행위를 저질렀다고 실토한다. 구체적인 장소와 시각, 그리고 방법까지 세세히 적힌 범죄 리스트를 건네받은 김 형사, 물론 의심스러운 정황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자신의 촉을 믿고 이를 파헤쳐보기로 작정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히고 마는 김 형사다. 강태오가 알려준 사실이 사실이 아니었던 것. 수형시설에 수감돼 있는 강태오를 찾아가 그의 속내를 떠보니 김 형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영치금 입금 및 감옥 내에서 필요한 기타 물품 등의 반입과 강태오 자신의 범죄 행각을 놓고 김 형사와 줄다리기를 시도하고 있었던 셈이다. 김 형사는 못이기는 척 그의 요구를 들어주는데...

 

 

부산에서 실제로 발생한 암수범죄(피해자는 있지만 신고도 사체도 없는 탓에 수사가 진행되지 않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미제 살인사건)를 토대로 감옥에서 추가 살인을 자백한 살인범과 해당 사건들의 흔적을 뒤쫓는 형사의 이야기를 다룬 범죄 심리 영화다. 사이코패스보다 더욱 그 속내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감정불가 판정을 받은 지능적인 연쇄살인마 강태오와 공명심 때문이 아닌, 살인마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이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며 다시는 비슷한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진정성 있는 열혈형사 김형민의 치밀한 심리전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지난 2012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전파를 타며 대중들에게 알려졌던 실화를 모티프로 한다.

 


강태오는 천하의 몹쓸 살인마다. 어릴 적부터 시작된 살인 행각은 나날이 발전, 사람을 죽이고 사체를 훼손하는 일쯤은 어느덧 그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 돼버렸다. 게다가 자신의 행위를 누군가에게 과시하려는 습성도 지녔다.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일이 벌어지거나 아주 작은 불편함조차도 그에게는 살인의 빌미로 작용하곤 한다. 소위 사이코패스라 불리는 연쇄살인마의 특징을 고스란히 빼닮은 셈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사이코패스는 또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도저히 그의 감정을 헤아릴 수 없는, 감정불가의 속내를 지닌 희대의 살인마였던 탓이다. 감정불가에 영악함마저 더해지니 그야말로 가공할 만한 위력의 캐릭터로 다가올 법하다. 그는 법의 한계를 꿰뚫어본 뒤 이를 역이용, 자신이 가져갈 수 있는 이득을 모두 취하면서 공권력을 농락하는 등 이런 류의 일처리에 있어선 일종의 선수와 다름 없었다. 김형민 형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뒤 자신의 의지대로 사건의 행방을 쥐락펴락하는 그의 뻔뻔함은 놀라울 따름이다.

 

한편 강태오의 마수에 걸려든 김형민 형사, 그는 강태오의 표적이 될 만한 요건을 두루 갖춘 인물이다. 살인사건과는 별개인 마약 전담반에 소속돼 있는 데다가 그동안 입신양명과는 거리가 먼 직장생활을 해왔고, 게다가 부유한 가정환경 덕분에 경제적으로 넉넉하다는 현실이 강태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놀라운 통찰력(?)을 지닌 강태오는 자신의 사건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그에게 자신의 살인 행각을 조금씩 흘리면서 그를 미혹시키고, 현재 유일하게 혐의가 입증된 살인사건마저도 판결을 뒤집으려는 음흉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김형민 형사는 강태오가 펼치는 심리전에 끌려다지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면서도 살인사건의 혐의를 입증시키려는 노력을 경주한다. 하지만 이렇듯 김형민 형사 개인이 각고의 노력을 쏟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 내부의 기류는 썩 좋지 못하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벌어진 사건을 해결하는 일이 아무래도 공적을 쌓기에 훨씬 이롭고 승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암수범죄를 모두가 꺼려하는 이유다. 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이를 해결해야 했다.

 


피해자는 존재하지만 신고가 없고 증거도 없어 해결하지 못하는 사이 범죄자들은 뒤에서 웃으면서 또 다른 피해자를 물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공적이나 승진과는 거리가 멀어도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이나 또 다른 범죄의 표적에 놓일지도 모르는 이들을 그저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희대의 감정불가 살인마 강태오, 그리고 공명심이 아닌 의협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김형민 형사, 이 두 사람의 심리 싸움은 과연 누구의 승리로 끝나게 될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 기류 속에서 펼쳐지는, 우열을 가리기 힘든 고도의 심리전이 이 작품의 백미다. 초반에는 강태오가 압도적인 승리로 끝날듯 분위기를 장악하지만, 이내 강태오의 심리를 꿰뚫은 김형민의 반격이 이어지면서 둘의 심리 싸움은 엎지락뒤치락 우열을 가리기 힘들게 된다. 살인사건 현장만이 뿜어낼 법한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 긴장감을 팽팽하게 당기는 극의 전개,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 호흡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관객들의 몰입감을 최고조로 끌어 올린다.

 

감정불가 사이코패스의 잔혹함이란 어떤 류의 것인지를 관객들에게 드러내기 위해 곳곳에 마련된 장치들은 부족함이 없었다. 적절했다. 지나치게 잔인하거나 끔찍한 화면 처리 없이 극의 분위기와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조합만으로도 관객들에게 충분히 전달되고도 남았을 것 같다.

 


주지훈의 연기 변신은 놀랍다. 연기폭이 이렇게 넓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가 광기를 드러낼 때는 실제 사이코패스가 빙의라도 한듯 섬뜩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덕분에 더욱 긴장하면서 극을 관람할 수 있었다. 김윤석의 노련한 연기는 이번 작품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의 차분하면서도 호소력 짙은 연기 덕분에 극의 분위기를 널뛰기 하지 않도록 조율하면서도 심리극으로써의 텐션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고 판단된다.

 

지난 추석 연휴 즈음에 개봉했던 영화 '협상'을 통해 제목처럼 심리극을 펼쳐주길 바랐지만 예상과는 달리 전혀 다른 방향으로 극이 전개되면서 이를 기대했던 관객들을 실망시켰다면, 이번 작품만큼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것 같다.  



감독  김태균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