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용서가 증오에 비해 월등히 값진 이유 '파도가 지나간 자리'

새 날 2018. 10. 6.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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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전쟁 영웅 톰(마이클 패스벤더), 그는 어느 날 한적한 섬 야누스의 등대지기로 취업한다. 등대 관리인의 딸인 이자벨(알리시아 비칸데르)은 점잖으면서도 진중해보이는 그를 내심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다. 그러나 전쟁통 속에서 감정을 잃은 채 살아온 그였기에 비록 그녀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관심은 그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오기 일쑤다. 일종의 전쟁 후유증 탓이다. 하지만 결국 마음의 문을 조심스레 연 톰은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


두 사람은 야누스섬에서 행복한 신혼생활을 꾸려나간다. 이 섬은 어느 곳보다 멋지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병원도 학교도 교회도 일절 없이 오로지 두 사람만이 서로를 의지해야 하는 외로운 공간이기도 하다. 외부와의 소통은 정기적으로 왕래하는 보급선에 의해 이뤄지는 게 전부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자벨은 이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생활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눈치다. 아기도 둘이나 유산하고 만다. 그날도 그랬다. 그녀가 두번째 아기를 잃은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문득 야누스섬으로 의문의 배 한 척이 떠밀려 들어오는 광경을 목격하는데...



이 작품의 원작은 2012년 출간된 M.L. 스테드먼의 '바다 사이 등대'라는 제목의 소설이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삶 자체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이자 목적이 돼버린 참전용사가 등대지기로 취업, 한 여성과 만나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다가 우연히 떠밀려온 배에 실린 누군가의 아기를 맡아 키우게 되면서 이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리게 된다는 이야기다.



전쟁으로 인한 상흔은 톰처럼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겠지만, 두 오빠를 전쟁으로 잃는 등 이자벨의 경우처럼 간접적으로 남아있는 사례가 더 많다. 상실감이다. 아마도 이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라면 응당 감내해야 할 대표적인 전쟁 후유증이었을 테다. 톰과의 결혼 생활은 한동안 행복감 그 자체였으나, 아기의 유산은, 그것도 둘씩이나, 내면 속에서 잠자던 그 낯익은 고통을 다시금 일깨우는 기폭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외딴섬에서의 외부와 단절된 생활은 그녀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며 상승효과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 순간 그녀 앞에 떠내려온 누군가의 아기, 우연이라기보다는 왠지 정황상 그녀의 처지를 간파한 신의 선물쯤으로 받아들여질 법하다. 어느 누구보다 합리적이며 원칙주의자로 통했던 톰마저 그녀의 간절함을 모른 체하기가 곤란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톰은 떠내려온 배와 이미 숨진 아기 아빠로 보이는 남성, 그리고 아기를 당국에 신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아울러 가까운 훗날 이 사건으로 인해 보다 심각한 문제로 불거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진즉에 간파했으면서도, 이자벨의 처지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그저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린 채 묵묵히 이를 받아들인다. 이자벨을 극진히 아끼는 톰만의 고유한 사랑법이었다.



범죄 행위임을 알면서도 아내를 사랑했기에, 아울러 아내의 상실감이 그녀의 마음을 얼마나 갈갈이 찢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톰의 심정, 그리고 자기 피붙이인 양 애지중지 키우던 아기를 차마 떼어내지 못하는 이자벨의 마음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헤아려지기에 우리는 그들의 선택에 함부로 비난의 잣대를 들이대기가 쉽지 않다. 아울러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딸과 함께 나룻배에 올라 탈출을 감행해야 했던 아기 아빠의 선택과 이후 그의 아내인 한나(레이첼 와이즈)가 감내하게 될 고통의 크기 및 그에 따르는 행위들 또한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섬 야누스는 이름 그대로 두 개의 상반된 얼굴을 갖고 있다. 평소 너무 아름다우면서도 평온해보이는 바다 풍광을 만들어내지만 아주 간혹 성난 파도가 휘몰아치고 거센 바람이 섬 곳곳을 할퀴는 무서운 곳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톰 홀로 머무르고 있을 당시엔 그의 바람 그대로 삶 자체를 유지하게 해주는 곳이자 이자벨과 두 사람이 결합한 뒤에는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는 보금자리 역할을 톡톡히 하지만, 때로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을 파멸로 몰아가는, 지옥과 진배없는 곳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쭉 평탄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듯이 모진 풍파를 감내해야 할 때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용서하느냐 혹은 증오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 역시 극명하게 갈리기 십상이다. 한나의 남편이 살아 생전에 그녀에게 말했던 것처럼 용서는 한 번만 하면 그만이지만, 누군가를 증오하는 건 나쁜 일을 떠올리면서 하루종일, 매일 그리고 평생을 해야 하는 소모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감독  데릭 시엔프랜스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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