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당신은 훨씬 좋은 사람일지 모른다 '디어 랄프 로렌'

새 날 2018. 10. 4.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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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수는 미국 유학 중인 청년이다. 대학원에서 연구 과정을 밟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비록 완곡하게 표현하긴 했으나 지도교수가 그에게 퇴출을 선언한 것이다. 종수는 이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괴로웠다. 자괴감에 빠져든 그는 연일 술을 퍼부으며 스스로를 혹사시킨다. 세상과의 단절을 시도한 것이다. 도망치듯 브루클린으로 거처를 옮긴다. 의욕을 잃은 데다 목적의식마저 놓아버린 그, 서랍을 열다가 문득 잊고 지내온 수년 전 누군가가 자신에게 보내온 청첩장 한 장을 발견하게 된다.


10년 전 한국에서의 학창 시절이 그의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러니까 청첩장을 보내온 당사자 수영이와의 아스라한 기억을 소환하게 된 것이다. 수영이는 의류회사 대표인 랄프 로렌에게 해당 브랜드의 시계 제작을 제안하기 위해 편지를 쓰고 있었으며, 종수가 이를 영문으로 번역하는 일을 도맡고 있었다. 종수는 관련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랄프 로렌이라는 인물에 대해 좀 더 깊이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이때부터 그는 랄프 로렌과 관련한 사안은 어떤 종류가 됐든 일일이 찾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는데...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랄프 로렌이라는 브랜드며, 인물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랄프 로렌의 일생을 그린 전기가 아님에도 이토록 그를 자세하게 파헤친 책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랄프 로렌을 향한 관심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이 무한 열정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한 청년이 대학원 연구 과정에서 퇴출됨으로써 이로부터 받은 충격이 적지 않았으리라는 건 충분히 짐작되는 사안이지만, 그래서 세상과의 단절을 꾀하려 했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지만, 왠지 이것만으로 랄프 로렌에 빠져들었다고 말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할 것 같다.



그렇다면 학창시절 랄프 로렌이라는 의류 브랜드를 매개로 잠시 동안 인연을 쌓았던 수영과의 관계와 에피소드로부터 이를 해결해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종수와 랄프 로렌과의 관계는 그저 당시 유행하던 의류 브랜드 가운데 하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테지만, 수영과의 관계로부터는 무언가 아스라한 감정의 배설물 따위가 여전히 남아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도 아니라면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작가의 말' 속에서 그와 관련한 단초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나는 소설가가 굉장히 좋은 망원경을 가지고 있는 우주인과 비슷한 게 아닐까 하고 종종 생각한다. 저멀리 낯선 행성의 작은 불빛을 응시하고 마침내 그 속에서 그(혹은 그녀)의 얼굴-표정을 발견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혹은 그녀) 때문에 마음 아파하기도 하고, 안도하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고, 때때로 화를 내기도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 그저 나는 소박한 마음으로 바랄 뿐이다. 내가 ‘매우’ ‘멀리’ 존재하는 세계를, 그리고 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보게 되기를



종수와 수영은 고등학생 때 같은 반 친구였으며,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랄프 로렌 브랜드 의류가 크게 유행 중이었다. 수영은 속옷부터 외투며 액세서리까지 일관된 브랜드를 갖추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당시 랄프 로렌 브랜드는 시계를 생산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이후에도 시계 생산은 이뤄지지 않는다. 어쨌거나 랄프 로렌 컬렉션을 완성하는 데는 시계가 필수 품목이라고 판단한 수영은 랄프 로렌 대표에게 시계 생산을 제안하고자 했으며, 영작 실력이 조금 더 나은 종수가 그녀의 깜짝 파트너 역할을 자처했던 셈이다.


종수에게 있어 당시 편지를 실제로 보냈는지 혹은 보내지 않았는지의 여부에 대한 기억은 사실상 가물가물하다. 아마도 그가 랄프 로렌에 유독 집착하게 된 건 이렇듯 맥락이 끊겨있거나 뒤섞인 기억을 되살리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게 한다. 랄프 로렌을 향한 종수의 집착은 생각 이상으로 집요했다. 랄프 로렌 본인을 파고드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그 주변 인물들까지 샅샅이 뒤져 조금이라도 랄프 로렌과의 연관성이 있는 부분을 찾아낸 뒤 해당 인물에게 연락하거나 직접적인 접촉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작가라는 가짜 직업인 행세를 해야 할 때도 있었다. 세상과 의식적으로 단절을 꾀하려던 그 앞에 불현듯 나타난 수영의 청첩장 한 장, 이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스스로 낭비라고 생각했던 짧지 않은 시간 동안을 랄프 로렌과 그 주변 인물들을 파헤치는 데 할애케 하였으며, 비록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시대의 다른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세상은 여전히 열려있으며, 아울러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를 스스로 터득하게 한다.


섀넌, 이 세상의 누군가는 당신의 문을 두드리고 있을 거예요. 그냥 잘 들으려고 노력만 하면 돼요. 그냥 당신은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돼요.


섀넌 헤이스가 내 등을 두드렸다. 잭슨 여사가 내게 해주었던 것처럼. 나는 마치 그게 노크 소리 같다고 느꼈다. 누군가가 내 문을 두드리는 소리. '이봐요, 살아 있어요?'라고 물어봐주는 목소리.


대학원 지도교수로부터 퇴출당한 뒤 의도적으로 세상과 연결된 통로를 굳게 걸어 잠그고 단절을 시도했던 종수, 하지만 대학원 동료 지아 류가 새삼 세상과의 끈이 끊어지지 않고 여전히 이어져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듯이 랄프 로렌을 연구하고자 이에 대해 파헤치면서 인연이 되어주었던 잭슨 여사와 셰넌 등 주변 인물들 역시 이 세상은 항상 당신의 문을 두드리고 있으니 이에 신경을 곤두세워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종수가 섀넌에게, 섀넌이 종수에게 각기 그렇게 다가왔던 것처럼, 당신은 생각보다 훨씬 좋은 사람일지 모른다.



저자  손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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