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안에서는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바깥은 여름'

새 날 2018. 9. 15. 20:58
반응형

어느 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가 유치원 차량 사고로 숨지고 만다. 젊은 부부의 상실감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시간은 약이 되었던 듯싶다. 그동안 감히 입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보상금 명목으로 받은 보험금에 대해 이의 용처를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연히 아이가 남긴 흔적을 발견하게 된 부부는 또 다시 죽은 아이 생각에 오열하게 된다. 주변 사람들은 젊은 부부가 겪는 아픔에 대해 남의 일처럼 여기지 않고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시해왔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이도 변모하기 시작한다. 흡사 전염병이라도 되는 양 자신들마저 불행에 감염될까 봐 전전긍긍, 모두들 부부를 피하거나 뒤에서 수군거렸다. 작가의 표현을 잠깐 빌리자면 내가 이만큼 울어주었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어도 되지 않겠느냐는 반응이었으며, 겉으로는 꽃을 든 채 진정으로 위로해주는 척하면서 뒤에서는 그 꽃으로 꽃매를 가하는 격이었다. 부부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김애란의 단편소설 모음집 '바깥은 여름'에 실린 '입동'속 이야기다. 비록 허구이지만, 왠지 이 이야기로부터는 기시감이 느껴진다. 작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묘하게 4년 전 발생한 세월호 참사가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속절 없이 물에 잠기고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자 세상 사람들은 탄식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쏟아냈다. 하지만 사고 수습이 지연되고 사건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늦춰질수록 정치권과 사회 일각에서는 지겹다며 이제 그만하자는 목소리가 비등해져 갔다. 급기야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비아냥거리거나 조롱하는 사태마저 빚어지고 만다. 자식을 잃은 상실감을 추스릴 겨를도 없이 희생자 유가족들은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집단 린치를 당한 채 힘없이 주저앉아야 했다.



이 책에는 '입동'을 비롯하여 '노찬성과 에반', '건너편', '침묵의 미래', '풍경의 쓸모', '가리는 손',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등 모두 7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일상에서 빚어질 법한 소소하거나 때로는 가슴 절절한 에피소드,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사건들을 섬세하면서도 간결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상실감만이 아니었던 듯싶다. 그로 인해 산산히 부서진 이들을 향한 유무형의 폭력을 묘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와 내용 내지 전달하는 바는 전혀 다르겠지만 우리 내면에 감춰져 있어 좀처럼 꺼내고 싶지 않은 은밀한 것들을 들춰내는 작가만의 독특한 솜씨는 '가리는 손'을 통해서도 발견하게 된다.


다문화가정 아이들은 우리와는 다른 외모 때문에 또래로부터 흔히 따돌림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하곤 한다. 이러한 편견의 경향성은 또 다른 편견을 낳기 십상이다. 즉, 괴롭힘을 당하며 성장한 아이들의 내면에는 울분이 쌓여 있을 것이라는 편견 따위의 것들 말이다. 하지만 다문화 자녀인 재이는 다행히 엄마의 극진한 보살핌과 스스로의 노력 덕분에 비교적 밝게 잘 성장해온 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또래 아이들이 폐지 줍는 노인을 폭행, 숨지게 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하필 재이가 그 현장 맞은편 인형뽑기기계 앞에서 이를 모두 보고 있던 장면이 CCTV에 포착된다. 엄마는 해당 사건과 관련하여 재이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천진난만한 아이의 웃음 속에서 문득 편견일지도 모르는 그 의뭉스러운 무언가를 발견하고선 소스라치게 놀란다. 자신의 자녀조차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도록 만드는 일종의 지독한 관성에 엄마는 어쩔 줄을 몰라해한다. 작가는 이렇듯 모두가 난처해할 만한 이야기를 스스럼 없이 들춰내는 데 소질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런 류의 이야기들과 정반대편에 놓인 이야기도 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명지는 남편을 사고로 잃었다. 교사 남편은 물에 빠진 학생과 목숨을 맞바꿨다. 명지는 자신 등 가족에 대한 배려 없이 먼저 가버린 그가 야속했다. 도대체 왜 자신을 생각지 않았던 것인지 곱씹을수록 빈정이 상했다. 이런 기분을 그녀는 스마트폰의 음성인식서비스로 풀어버리곤 했다. 이 녀석은 곤란한 질문에도 최대한 예의를 갖췄다. 명지는 괜시리 쓸 데 없는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공허한 감정을 해소시키려 노력한다. 물론 그럴수록 공허함은 왠지 더욱 커져가는 듯싶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살린 학생의 누나로부터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그녀는 이를 통해 비로소 남편의 희생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상실감 속에서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몰라 허우적대던 순간, 뭉클한 것을 낚으며 헛헛했던 모든 감정을 일시에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난 해 우리집에서 키우던 반려견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내겐 7편의 이야기 가운데 무엇보다 '노찬성과 에반'이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다. 고속도로 휴게소 주변의 시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아가던 초등생 노찬성은 휴게소에 있을 때면 어디론가 떠나는 이들의 들뜬 모습이 내심 부러웠다. 외국에 나가지 못하는 청년들이 그 기분만이라도 만끽하기 위해 공항에 머문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접한 적이 있는데, 찬성에게는 고속도로 휴게소가 바로 그짝이었다. 그날도 휴게소에서 부러운 시선으로 어디론가 떠나는 이들을 바라보던 찬성, 그러다 문득 떠돌아다니는 개 한 마리를 발견하고선 할머니를 설득시켜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다. 에반이라는 이름도 붙여주었다.



애지중지하며 추억을 쌓아가던 어느 날, 에반이 아픈 것 같아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암에 걸렸단다. 너무 힘들어하는 에반을 위해 안락사시키는 방법도 있다는 수의사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찬성은 차라리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기특한 생각에 비용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에 뛰어든다. 무척 힘들었지만 괴로워하는 에반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마침내 목돈을 손에 쥐게 된 찬성, 비록 오래됐지만 때마침 할머니가 자신이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스마트폰을 건네준다. 찬성은 이때부터 에반을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겠다는 갸륵한 마음 씀씀이와 스마트폰을 위한 지출 욕망 사이에서 힘겨운 줄다리기를 펼치게 된다.


결말은 씁쓸했다.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욕망에 쉽게 휩쓸리곤 하는 우리로 하여금 정신을 번쩍 들게 하기 위한 요량이었는지 작은 희망조차 품을 수 없도록 막다른 골목으로 독자들을 자꾸만 몰아간다. 문득 동물병원을 잘못 선택하는 바람에 3일동안 덥고 좁은 우리에서 꼼짝 없이 갇힌 채 주인 얼굴도 보지 못하고 숨져간 우리집 개 미르가 떠오른다. 미르를 추억하며...



저자  김애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