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부채의식 일깨우는 5월 광주 '소년이 온다'

새 날 2018. 9. 9.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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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는 15세에 불과한 중학생 소년이다. 그런 그의 운명을 가른 건 1980년 5월 눈부시게 푸르던 어느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청 광장에는 벌써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군인들의 만행과 계엄 철폐를 부르짖고 있었다. 그맘때 아이들의 성향이 그러하듯이 동호와 정대는 인파를 뚫고 선두 방향을 향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시민들이 총탄에 맞아 고꾸라졌다. 정대도 옆구리에 총탄을 맞은 채 붉은 선혈을 길 위에 쏟아내고 있었다.


동호는 쓰러진 정대에게 어떻게든 접근하려 시도했으나 사람의 기척만 있으면 귀신 같이 이를 알아채고 어디선가 총탄이 날아들었다. 건물 곳곳에 저격수가 숨어 있었던 탓이다. 결국 동호는 정대에게 가지 못했다. 아니 갈 수가 없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어른들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조심스레 탈출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정대는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당시 계엄군에 의해 학살된 시신의 숫자가 너무 많다 보니 도청 상무관에 임시로 안치되고 있었다. 동호는 정대의 주검을 찾으려는 요량으로 상무관을 방문하였고, 이곳에 안치된 시신의 관리 임무를 맡게 된다. 부패해가는 시신들 사이에서 생활하다 보니 정대와의 추억이 더욱 아련해지는 동호였다. 하지만 정대를 찾을 길은 없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계엄군 측과 최후의 일전만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동호의 가족은 계엄군이 곧 도청으로 들이닥친다며 동호에게 빨리 빠져나올 것을 종용한다.


동호와 함께 시신을 수습하고 시민군 활동을 하던 형과 누나 등 지인들도 끝까지 항전을 하기에는 동호가 너무 어리다며 이를 만류한다. 그러나 동호는 이미 죽은 정대로 인해 평상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정체 모를 죄의식 같은 게 동호의 마음을 옥죄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부채의식이다. 결국 15세 소년은 불안해 보이는 기색이 역력한 상태에서 소총을 어깨에 걸머쥔 채 결사항전에 나서는데... 



이 책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인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발포로 친구를 잃은 중학생 동호가 주변에 있던 지인을 도우며 계엄군에 의해 스러져간 주검 수습을 도맡아 하다가 도청에서 벌어진 최후의 항전에 나서 결국 목숨을 잃고 만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와 이후 항전에서 비록 극적으로 살아남긴 했으나 이의 여파로 인해 비참하게 목숨을 부지하거나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동호 주변인들의 삶을 조망하며 우리로 하여금 부채 의식을 일깨우는 소설이다.


동호는 정대의 죽음을 생각하며 과거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는 순간 얼굴에서 어린 새 같은 게 문득 빠져 나가는 느낌을 떠올린다. 정대가 숨질 때도 과연 그 어린 새 같은 게 몸에서 빠져 나갔을까?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이미 주검이 된 정대가 몸에서 빠져나온 어린 새 같은 영혼의 시선으로 자신의 썩어가는 몸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읊는다.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중략)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숨져간 탓에 구천을 떠돌게 될 정대 영혼의 이 읊조림을 보면서 문득 80년대 운동가요인 '오월의 노래' 가사 한 도막이 떠오른다. 과연 우연일까? '왜 쏘았니, 왜 찔렀니, 트럭에 싣고 어딜 갔니...'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각진 각목이 어깻죽지와 등허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곧은 물성대로 활짝 펴지며 내 몸을 비틀 때,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헐떡이는 일초와 일초 사이, 손톱과 발톱 속으로 그들이 송곳을 꽂아넣을 때, 숨, 들이쉬고, 뱉고,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신음, 일초와 일초 사이, 다시 비명, 몸이 사라져주기를, 지금 제발, 지금 내 몸이 지워지기를,


남겨진 자들의 고통 또한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 소설은 동호 주변의 인물들, 그러니까 상무관에서 시신을 수습하고 도청에 남아 끝까지 항전하는 등 5.18 민주화운동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들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뒤쫓거나 되짚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는가를 한강만의 어법으로 따스하게, 때로는 차갑게 다가간다.



고문을 당해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면서 그들이 문득 떠올렸던 건 바로 이 거추장스럽기만한 몸뚱아리를 차라리 버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노라는 울부짖음 같은 것이었다. 절망적인 고통 속으로 몰아넣어 극단의 치욕을 경험케 하고 급기야 차라리 죽여줄 것을 외치게 만드는 게 바로 저들의 목적이었다. 때문에 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저들에 의해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를 뿌리째 흔들어온 고통의 근원 육신을 차라리 버리고 싶은 심정이 굴뚝 같았으리라.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베트남전에 파견됐던 어느 한국군 소대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시골 마을회관에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을 모아놓고 모두 불태워 죽였다지요. 그런 일들을 전시에 행한 뒤 포상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중 일부가 그 기억을 지니고 우리들을 죽이러 온 겁니다.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듯 동일한 잔인성으로.


1980년 5월 당시 광주 일원에서 벌어진 잔혹한 행위는 베트남전이나 난징, 보스니아 그리고 대항해시대 당시 신대륙에서 행해진 살육전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도 우리 군인에 의해서 말이다.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싶고 이를 행사하고 싶은 건 인간의 기본 욕구 가운데 하나일 테니, 이 과정에서 드러나던 잔인무도함 역시 인간이 지닌 본질적인 것이냐고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작가가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인간의 유전자에는 이와 동일한 잔인함이 아로새겨져 있는 걸까? 광주 학살은 단지 감춰져 있던 이러한 본성을 살짝 끄집어낸 것뿐일까?


특별하게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다. 처음 자료를 접하며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연행할 목적도 아니면서 반복적으로 저질러진 살상들이었다.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 그렇게 잔인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명령했을 지휘관들.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페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나는 아니라 대답하고 싶다. 계엄군들 중에서도 특별히 잔인한 군인이 있었던 반면,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인간의 선함 역시 우리의 유전자에 아로새겨진 채 상황에 따라, 아울러 각자의 의지에 따라 앞서의 것과 힘 겨루기를 하게 되는 건 아닐까?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은 모두 80만 발이었다고 한다. 당시 도시 인구가 40만이었으니 도시민 전체를 죽이고도 남을 만큼 많은 분량이었다. 도청에 남아 끌까지 결사항전에 임한 시민들의 마음 한켠엔 한결 같은 게 있었다. 자신들의 죽음이 수천 혹은 수만곱절에 이르는 누군가의 죽음을 대신하는 것이라는 생각,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계엄군이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느 누구 하나 방아쇠를 쉬이 당기지 않았다. 선한 의지가 잔인한 본성을 압도한 것이다.



5.18 민주화운동이 벌어지던 당시 광주는 치안 공백 상황이었음에도 범죄 행위가 평소보다 되레 적었다고 한다. 시민들은 도시를 사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시민군을 자처했으며, 이들을 도우려는 또 다른 시민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기도 했다. 항쟁 마지막날 도청에 들어가면 절대로 걸어나오지 못하고 주검이 되어서야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도청을 사수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이들을 움직이게 한 건 앞서 언급한 인간의 잔인한 본성이 아니라 내가 아니면 누군가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양심, 바로 그 숭고함이라는 선한 의지와 연대의식 아니었을까? 저자는 그동안 무수한 이들에 의해 분석되고 다루어졌던 우리의 아픈 현대사를 또 다시 끄집어내어 그만의 방식으로 5.18 희생자와 가족들을 따스하게 감싸안으며 위로한다. 아울러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는 바로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 위에 터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상기시키며 우리로 하여금 동호가 지녔던 부채의식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저자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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