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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감력 발휘가 절실한 시대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새 날 2018. 9. 14.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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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서 문득 작금의 기술 발전 속도를 떠올려본다.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이를 따라가는 일이 무의미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저 적응하는 일만으로도 벅차니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기하급수 시대가 온다'의 공동 저자 살림 이스마일은 이러한 시대를 이른바 기하급수시대라 지칭한다. 인간의 능력은 산술급수적인 데 반해 세상은 이미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 현상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매우 적확한 표현이라 생각된다. 2007년 스마트폰이 첫선을 보인 이래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변화엔 엄청난 가속도가 붙고 있다. 인텔 및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창립자인 고든 무어는 1965년 기고를 통해 향후 최소 10년간 마이크로칩의 성능이 매 1년마다 두 배씩 늘어날 것이라고 주창한 바다. 이른바 무어의 법칙인데, 세상은 이제 이를 훌쩍 뛰어넘어 무수한 양적 변화들이 한데 모여 어우러지더니 전혀 새로운 형태의 질적 변화로 진화하고 있는 와중이다.



그렇다면 이 양적 팽창을 질적 변화로 이끄는 시대를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우리처럼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의 상태는 과연 어떻게 될까? 산술급수적인 변화에 간신히 적응해온 인간이 기하급수시대를 온전히 맞이하고, 또한 버텨낼 수 있을까? 소설 '실락원'으로 일본과 한국에서 유명세를 떨쳤던, 이미 고인이 된 와타나베 준이치는 이처럼 급속도로 변모하는 세상을 뒤쫓느라 과부하에 걸린 현대인들에게 '둔감력'으로 이를 버텨낼 것을 조언한다.


이 책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는 바로 둔감력에 관한 이야기다. 2007년 일본에서 '둔감력'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을 당시 해당 신조어가 그 해의 유행어에 등극할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이도 어느덧 10년 전의 일이다. 세상은 당시에 비해 벌써 저만치 달아나고도 남을 것으로 짐작된다. 저자는 스트레스에도, 인간관계에도, 남녀간의 사랑에도, 결혼생활에도, 암 따위의 몹쓸 질병에도, 심지어 수면 습관에도, 그 밖에 모든 상황에서, 이 둔감력은 우리의 예민한 감각으로 인해 곤두세워져 있을 법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더 강한 자아로 거듭나게 한단다. 이쯤 되면 만병통치약이 따로 없을 것 같다.



한때 정형외과 의사이기도 했던 저자는 신체에 대한 생각도 남다른 편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감성적 측면이 발달한 탓에 상대적으로 예민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의외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둔감하고 강하단다. 특히 어머니라는 이름의 여성이 유독 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신체적 특징으로 설명하는 대목에선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여성의 피하지방층이 남성보다 두꺼워 추위에 강하다는 속설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인데, 의사인 저자가 이를 여성이 더 둔감한 근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둔감력이란 단순히 무신경함을 의미하는 걸까? 물론 그럴 리 만무하다. 그가 말하는 둔감력이란 괴롭고 힘든 일이 발생할 때, 혹은 일이나 관계에 서툴러 크게 낙담하거나 상실감을 느낄 때, 즉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으레 접하게 되는 모든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힘차게 나아가는 그런 류의 강한 힘을 일컫는다. 일종의 정신 승리 개념에 가깝다. 혹은 어떤 측면에서는 마크 맨슨이 쓴 책 '신경끄기의 기술'에서 언급되고 있는 삶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들에 대해선 의식적으로 신경을 끄는 지혜가 필요하며 핵심적인 가치에만 집중하자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웃이 강남에 아파트를 사도 배가 아프지 않으며, 무례한 사람 앞에서 당당함을 잃지 않거나 구시렁거리는 잔소리도 대충 흘려넘기고, 그냥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며, 일과 승진에 민감해지지 않을 수 있고, 상대가 나를 질투하고 비난해도 괜찮으며, 독사 같은 상사를 대하면서도 어디에나 그런 사람은 있기 마련이라며 가볍게 털어버릴 수만 있다면, 즉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를 힘들게 하거나 괴롭히는 사람 일 따위 그냥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며 씩 웃고 돌아설 수만 있다면, 정말로 우리 삶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짐 가운데 하나를 훌훌 털어버리는 셈 아닐까 싶다.


의사로서 말하는 항상성 유지와 지나치게 민감하고 까다로운 위생이 오히려 면역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주장, 예민하지 않아야 암 등의 질병으로부터 멀리할 수 있으며 혹여 질병에 걸린다고 해도 이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 등은 조금 느긋한 마음을 갖고 유지하게 하는 즉, 둔감력을 키우는 데 있어 든든한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킨다. 다만 저자가 말하는 그 둔감력이라는 능력을 일정 수준으로 키우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감각의 촉수를 일제히, 그리고 예민하게 깨워 이를 총동원해야 할 듯싶은데, 정작 책의 내용 자체가 매우 느슨하고 둔감하게 다가온다는 사실은 다소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저자  와타나베 준이치

역자  정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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