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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된 잣대, 남자다움에서 벗어나자 '맨박스'

새 날 2018. 9. 8.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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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커뮤니티에서 조금이라도 여성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거나 페미니즘의 '페'자만 등장해도 남성들이 게거품을 물듯이 덤벼든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이상하게 여성의 권리 얘기만 나오면 남성들이 쉽게 이성을 잃곤 한다. 그러면서도 헐벗은 여성의 이미지나 걸그룹 멤버의 사진 게시물이 '후방주의'라는 말머리와 함께 올라올 때면 그와 반대로 너 나 할 것 없이 품평 행위에 빠져든 채 침을 질질 흘리면서 정신줄을 놓거나 환호성 일색이 아닌가. 이러한 현상은 도대체 왜 발생하는 걸까?


이를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책 한 권이 있다. 미국의 사회운동가인 토니 포터가 쓴 책 '맨박스'다. 저자가 여성이라면 혹시라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이가 존재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다행히 남성이다. 그렇다면 남성이 남성을 디스하는 꼴인가? 단언컨대 그렇지는 않다. 이 책은 저자가 사회에 굳건히 자리 잡혀있는 이른바 남자다움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남성들이 이끄는 여성 폭력 방지 운동을 이어가자는 취지에서 발간됐다. 그러니까 사실 여성들보다는 남성들이 부지런히 읽어야 할 책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이 책을 받아든 뒤 진지하게 읽을 남성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다시 서두에서 언급했던 내용으로 돌아가보자. 남성들은 왜 여성에 대한 권리 얘기만 나오면 지금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까? 이는 오래 전부터 사회적으로 학습되어온 남자다움이라는 남성 본위 즉,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문화 때문이다.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해온 여성들이 자꾸만 권리를 침해해오자 꺼림직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남자다움은 크게 세 개의 축을 토대로 한다. 그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건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인식이다. 알고 보면 대부분의 여성과 남성을 둘러싼 문제는 바로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경향이 짙다.



남자는 자라나면서 남자다울 것을 강요 당한다. 여자는 감성적이어도 크게 상관 없으나, 아니 도리어 이를 권장하고 있으나, 남성에게 감성 따위는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계집애처럼 울어서도 안 되고, 늘 의젓해야 한다. 반면 여자가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볼 때 울음이 허락되지 않는 연령대가 딱히 정해져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즉, 남자는 남자라는 이유로 감정을 밖으로 표출해서는 안 되며 이러한 행위를 바람직스럽지 않은 것으로 배워왔다. 왜일까? 여자보다 무조건 강해야 하는 바로 그놈의 남자다움이라는 무서운 잣대 때문이다. 남자다움의 반대 의미는 여자다움으로써, 여자는 언제나 다소곳해야 하고 말썽 없이 이쁘게 자라야 한다고 배워왔다.


이러한 결과는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암암리에 각인시킨다. 아울러 남성의 사회적 지위가 여성보다 우월하므로 부지불식간에 남성이 여성을 리드하고 지배하는 것이 당연한 결과물로 생각되게 만든다. 이러한 전 과정을 우리는 자라오면서 사회적으로 학습하고 체화시켜왔다. 이를테면 마트의 장난감 코너에 가면 온통 핑크핑크한 곳은 여아 코너, 푸른색 천지인 곳은 남아 코너 따위 같은 것들 말이다. 결국 여성들이 권리를 외치고 주장하는 건 남성들이 그동안 누려온 지위와 권리 가운데 일부를 침해 당하는 것과 진배없다고 여겨지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이 정도만으로도 남성들이 왜 게거품을 물며 흥분하는 것인지 어느 정도 설명 가능하지 않을까?


근래 데이트 폭력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여성의 권리가 크게 신장되면서 폭력 행위를 신고하는 사례가 늘고 있고, 때문에 데이트 폭력 현상이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으나 사실 데이트 폭력은 아담과 이브가 탄생한 이래로 끈질기게 존재해왔던 행위에 다름 아닐 테다. 이는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그릇된 인식으로부터 기반한다. 그러니까 남자다움의 또 다른 축이다.



실제로 연인으로 보이는 커플이나 부부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져 여성이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면서도 이를 모른 척한다.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 수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연인이나 부부 사이가 아닌 경우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아마도 주변에서 도움을 주려고 여러 종류의 시도가 이뤄졌으리라 짐작된다. 적어도 112에 신고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성이 일방적으로 남성에게 폭행을 당하는 비슷한 상황임에도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걸까? 바로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근본 인식 차이 탓이다. 미국 기준으로 매일 병원 응급실에 실려오는 여성들의 35%가량은 남성에 의한 폭력의 직간접적인 결과물이라고 한다. 이렇듯 가정폭력과 성폭력은 여성들의 가장 흔한 신체적 상해 원인으로 꼽힌다. 그러니까 전적으로 남성들이 문제라는 얘기다.


남자다움의 마지막 축은 바로 여성은 남성의 성적 도구라는 시각이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남성들은 여성들의 권리 얘기만 나오면 게거품을 물며 이에 토를 달면서도 정작 여성의 사진을 올려놓고 품평을 일삼거나 벗은 여체의 이미지를 보며 관음증을 해소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가정폭력과 성폭력의 대부분은 남성이 가해자다.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이며, 남성이 여성을 소유 가능하고, 더불어 여성은 남성의 성적 도구에 불과하다는 철저한 남자다움의 관성이 이러한 결과를 빚고 있는 셈이다.



이른바 여혐 남혐의 시대다. 평생 결핍을 메우기 위해 상대를 갈구해야 하는 남성과 여성이 현실에서는 그와 반대로 서로를 증오하고 혐오하는 시대다. 남성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일베 등의 남성 본위의 커뮤니티에서 여성 혐오가 발현되어 이를 일반화하고 대상화로 가두기 시작하면서 여성들 사이에서 조직적인 반발의 싹이 움튼 것이다. 여혐을 조장하는 커뮤니티 자체를 미러링하는 여성 커뮤니티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남혐의 시대가 도래, 둘 사이의 간극은 갈수록 벌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이 와중에 미투운동이 불거지면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자 남성들의 불편한 심기가 극에 달해있다. 자신들이 그동안 누려온 권리에 대해, 사실은 권리가 아니었음에도, 여성들이 자꾸만 딴지를 걸어오니 못마땅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남성 중심주의는 사라져야 한다. 가정폭력과 성폭력을 근절하는 노력은 전적으로 남성들의 몫이다. 폭력과 차별은 종류와 관계 없이 사라져야 한다. 여성들이 내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동안 남자다움이라는 관성에 의지해 살아온 남성들에게 저자의 고해성사가 온전하게 다가올 리 만무하다. 관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것인지 잘 알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 있다가 이를 내려놓으라고 하니 탐탁잖은 건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남자다움에서 벗어나 폭력을 근절시키자는 한 남성의 애정 어린 호소는 같은 남성으로서 충분히 귀 기울여봄직한 주장이다. 이러한 작은 움직임들이 하나둘 모여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변모시킬 게 틀림 없으니 말이다.



저자  토니 포터

역자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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