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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이 들려주는 삶의 성찰 '열두 발자국'

새 날 2018. 9. 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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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사회의 변화를 이끌 만큼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어 청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인물이 노년으로 접어든 뒤 느닷없이 정반대의 신념을 펴거나 행보를 드러내면서 더 없이 큰 실망감으로 다가왔던 사례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렇게 변한 것일까 하며 혀를 끌끌 차거나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내게 남아 있다. 아니 안타까움을 넘어 연민의 감정으로까지 이어지곤 했던 것 같다.


물론 이는 세월이 흐르면서 단순히 자신의 신념이나 사상이 바뀌어 나타나는 현상으로 치부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흔히들 보수화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유독 노년에 접어들면서 비슷한 현상이 잦아지는 걸로 봐서는 이를 단순히 신념의 변화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들의 변화에는 모종의 공통분모 같은 게 존재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을 과학적으로 접근해보면 어떨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젊은 시절과는 달리 의사결정을 바꾸거나 조정하는 유연한 사고는 점점 줄어든다고 한다. 이는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이자 '열두 발자국'의 저자, 그리고 TV 인기 교양 프로그램 '알쓸신잡'의 출연자이기도 한 정재승 박사의 주장이다. 이른바 인지적 유연성의 저하다. 세상의 변화는 갈수록 빨라지는 데 반해 나이가 들수록 인지적 유연성이 떨어지니 주변에서 이들을 바라볼 땐 고집불통 노인으로 비칠 수밖에.


특히 아무리 인상적인 사건이라고 해도 2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이를 정확히 기억할 가능성이 10%도 채 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는 우리에게 놀라움을 던져준다.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으며, 누군가가 터무니없어 보이는 걸 믿는 데에는 또한 그 나름의 이유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유연한 태도가 요구된다는 점은 앞으로 우리가 삶을 어떤 방식으로 대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길을 잃지 않도록 일정한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대목이다. 이로써 내가 기록하고 있는 '늙어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에 리스트 하나를 추가하게 됐다.



'열두 발자국'은 정재승 박사가 기업이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뇌과학 강연 가운데 가장 흥미롭다고 여겨지는 12편을 묶어 출간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의사결정, 창의성, 놀이, 결핍, 습관, 미신, 혁신, 혁명 등 인간의 다양한 행동과 그것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을 통해 인간을 다각도에서 이해하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는 과학 하면 어렵다는 생각에 지레 겁부터 먹기 십상이다. 더구나 이 책은 그냥 과학도 아닌 무려 뇌과학을 다룬다. 심지어 두껍기까지 하다. 하지만 단언컨대 미리 겁 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가 워낙 이해하기 쉽도록 설득력 있는 언어와 글로 접근하고 있는 까닭이다.


현대인들의 특징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으레 이것을 꼽곤 한다. 결정장애다. 이러한 현상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들을 위해 등장한 서비스가 근래 위세를 떨친다. 점차 다양한 영역에서 각기 다른 방식의 큐레이션 서비스가 등장, 뭐든 선택하고 결정하기 어려워하는 이들을 지척에서 돕는다. 이러한 결정장애에 대해 저자는 다양한 원인이 존재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획일화된 교육을 가장 근본으로 꼽는다. 이의 해결을 위해 고스톱을 권장한다는 저자의 말을 단순한 우스갯소리로 치부해서는 안 될 듯싶다.


스스로를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밤에 손톱을 깎지 않으려 하고 돼지꿈을 꾼 다음날엔 여지 없이 로또를 구입하거나 시험날엔 미역국을 먹지 않는다. 비록 사소한 사례를 예로 들었으나 이러한 비합리적인 믿음이 때로는 아주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곤 한다. 1966년 일본의 출산율은 다른 해에 비해 유독 낮았다. 병오년에 태어난 말띠 여자는 사납다는 미신 하나 때문이다. 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 유럽에서는 근거 없는 속설에 의한 마녀사냥으로 최소 20만 명의 여성들이 죽임을 당했다. 통제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낳은 결과치고는 그 대가가 어마어마하지 않을 수 없다. 헛된 금기를 깨고 비이성적인 것들에 우리의 삶이 결코 휘둘리지 않도록 단속해야 할 당위성을 깨닫게 한다.


인공지능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당장 일자리를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오는 실정이다. 실제로 단순한 일처리는 인공지능 로봇이 대신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하지만 그만큼 인공지능의 한계 또한 명확해지고 있다. 감정 읽기나 공감 능력 등 제아무리 똑똑한 인공지능이라 해도 인간만이 지니고 있을 법한 고등한 사회성을 갖출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의 직업은 사회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것으로 예측되며, 가까운 미래에 직업을 갖게 될 젊은 세대가 어떤 방향으로 이를 준비해야 할지 참고해야 할 대목이다.



4차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근래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것이 무어냐고 물으면 그냥 관련 기술 몇 개를 나열하는 정도가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4차산업혁명이란 한마디로 무엇일까? 아톰세계(현실세계)와 비트세계(온라인세계)의 완전한 통합을 일컫는다. 즉, 현실세계를 온라인세계로 옮겨 정확하게 맵핑, 둘의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고 사물인터넷과 증강현실기술 등을 통해 우리 생활 곳곳에서 발현시키는 매우 편리한 세상을 말한다.


아울러 스마트폰 이후 세상을 지배하는 차세대 기술로는 현실세계와 비트세계와의 단절 없이 양쪽 세계를 상호작용케 하는 일상몰입기술을 꼽고 있다. 가뜩이나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현대인들이건만, 이쯤 되면 쾌재를 부를 만한 대목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점차 뼛속까지 디지털화되어가는 인간의 미래상은 과연 어떤 모습을 띨 것이며 또한 어떠한 양태로 진화해나갈 것인지 자못 궁금해지는 상황이다.


다행히 저자는 아날로그와의 균형 감각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데이비드 색스가 쓴 책 '아날로그의 반격'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다. 디지털이 대세인 요즘 시대에 자꾸만 아날로그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며 이를 아날로그의 반격이라 일컫는다. 하지만 정재승 박사는 이를 과도기적 현상으로 평가절하한다. 아날로그 시대를 살다가 디지털 시대로 넘어온 세대의 향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뼛속까지 디지털인 세대에게는 아날로그에 대한 아련한 추억 따위가 남아 있을 리 만무할 테니 나름의 설득력을 갖춘 셈이다.


다만, 디지털은 뇌를 자극시키고, 아날로그는 몸도 자극시키는 인자에 해당하기에 디지털 문명 속에서 허우적대는 현대인들이 지나치게 뇌만 자극시키기보다 몸을 함께 쓰고 반응하는,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아날로그의 반격을 받아들이는 게 옳은 시각이라고 그는 보고 있다. 블록체인이라는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 장차 서두에서 언급한 인지적 유연성이 절실해지는 지점이다. 혁명이라 불릴 만큼 큰 변화임은 분명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느릿느릿 우리 곁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나이가 더 든 뒤 혁명이 발현되더라도 이를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지적 유연성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보통 한 사람을 언급할 때 그의 정체성을 떠올리면서 특정 직업인으로 지칭하곤 한다. 하지만 정재승은 다른 사람들처럼 단순히 한 가지의 직업인으로 언급하기가 쉽지 않은 인물이다. 워낙 팔방미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훌륭한 물리학자이자 뇌과학자이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스승이고, 다른 분야와도, 이를테면 인문이나 예술 등 모든 영역과 끊임없이 소통, 우리 사회에 깊은 통찰력과 영감을 주고 있다. 일러스트레이터인 김한민은 이러한 그를 향해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라 호칭한다. 제법 근사한 지칭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렵다는 과학을, 그것도 뇌와 관련한 과학을 이처럼 재미있고 쉽게 풀어쓰다니, 정재승 그는 김한민이 언급한 것처럼 커뮤니케이터로서의 자질이 어느 누구보다 빼어난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어려운 학문을 대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재가공하거나 표현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그가 지닌 지식이 월등하다는 방증일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단순히 지식만 전달하는 지식 보부상도 아니다. 지식과 관련한 질문을 청중과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던짐으로써 삶을 성찰하게 하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자연스레 고민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가 뛰어난 재능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한 업적을 무척 이해하기 쉬운 언어와 글의 형태, 즉 불과 400쪽에 이르는 책 한 권의 형태로 압축하여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지난 포스팅에서도 인급했듯이 이처럼 꿀이득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저자의 지난한 노력의 대가를 비교적 손쉽게 취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의 말과 글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강연 그리고 이야기들은 우리를 사유의 세계로 깊숙이 이끌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삶의 성찰이라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한다. 현대인들이라면 반드시 한 번쯤은 읽어야 할 필독서로써 손색이 없다. 아울러 앞으로 이 시대를 이끌어나갈 미래의 주역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길잡이 역할을 해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를 믿고 열두 발자국을 차근차근 그리고 아주 느릿느릿 따라가보자.



저자  정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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