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손예진의 당찬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 '협상'

새 날 2018. 9. 20.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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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찰청 위기대응팀에서 근무하는 하채윤(손예진) 경위, 이날은 휴가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가정집에서 벌어진 인질 사건으로 인해 협상가의 신분으로 현장에 급파된다. 라포 형성을 위해 인질범에게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하면서 접촉을 시도하려던 그녀, 하지만 경찰 특공대의 배후 움직임을 간파한 인질범들이 순간 흥분을 이겨내지 못하면서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돌변하였고, 안타깝게도 인질들은 모두 살해되고 만다. 


협상 분야에서 만큼은 어느 누구보다 전문가로서 인정을 받고 있던 그녀였으나, 자신의 역량을 벗어나는 비슷한 사건이 하나둘 쌓여갈 때마다 하채윤은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인해 몸둘 바를 몰라해한다. 특히 이번 사건은 유독 그녀의 내면 깊숙이 파고들면서 극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 그러던 어느 날 하채윤의 상사(이상호)가 그녀를 찾아와 서울경찰청장의 호출이라면서 모처로 동행해줄 것을 종용한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도착한 그곳은 비밀요새와 다름 없었다. 



각종 통신 시설이며 디스플레이 장비 따위에는 시시각각 데이터가 올라오고 있었으며, 신분을 가늠할 수 없는 많은 이들이 동시에 이를 처리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경찰뿐 아니라 군과 국정원 그리고 청와대 간부까지 한데 모여 무언가 비밀스러운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모니터상의 누군가와 협상하라는 지시였다. 물론 사전 배경 지식 따위는 일절 알려진 바 없다. 모니터 화면 위로는 며칠 전 해외출장을 다녀오겠노라며 밝게 인사하고 떠난 하채윤의 소속 팀장인 정팀장(이문식)이 인질로 변모해 있었고, 민태구(현빈)라 불리는 인질범이 그녀와의 대화를 원하고 있었는데...



해외에서 국산 무기 밀매 등을 통해 점차 세력을 키워가던 민태구가 경찰관과 기자 그리고 민간인 등을 인질로 붙잡은 채 벼랑끝 전술을 통해 자신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려 하자 국내 최고 협상가인 하채윤이 그의 상대로 투입, 일촉즉발의 아슬아슬한 협상 과정 속에서 거대한 음모와 진실이 하나둘 드러나게 되고, 결국 그 배후에는 사회 권력층의 추악한 비리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는 범죄 액션 장르의 영화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그동안 제작된 숱한 범죄 영화에 또 한 편의 비슷한 작품을 얹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왠지 이 작품의 결은 여타의 그것들과 사뭇 다르다. 왜일까? 감독은 국내에서 아직 단 한 차례도 다뤄지지 않은 인질극과 협상이라는 소재를 전면에 내세워 극의 긴장감을 한껏 높이면서 다른 영화들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윤제균 감독이 직접 밝힌 제작 의도에도 비슷한 속내가 드러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을 긴장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소재가 무엇일까 고민을 하다가 협상이라는 단어를 끄집어냈다. 협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요소는 제한된 공간과 시간 안에서 어떤 식으로 긴장감을 끌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실제 작품 속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관객들의 긴장감을 끌어내고 있을까? 일단 무방비 상태인 인질의 목에 칼을 들이대거나 머리에 총탄이 장전된 총을 겨눔으로써 관객들을 흥분시키고, 텐션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관객의 입장에서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흔히 갖게 되는 심리 하나가 있다. 설마 하는 기대심리다. 그러나 감독은 이러한 심리는 물론이며, 일말의 희망조차 여지없이 뭉개버리는 방식을 택한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잠깐 동안의 방심조차 일절 허용치 않을 것임은 물론,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겠노라는 의도다. 



손예진과 현빈을 비롯한 배우들은 상대 배우를 직접 대면하며 연기하기보다 주로 모니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연기를 펼쳐야 했기에 곤혹스러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다행히 몰입하기에 악조건인 상황 속에서도 배우들의 연기는 흠 잡을 데가 없었다. 특히 민태구를 둘러싼 각종 비리들이 굴비 엮이듯이 줄줄이 파헤쳐지고 사회 권력층 인사들의 추악한 민낯이 낱낱이 까발려지면서 하채윤의 의식과 태도에도 조금씩 변화의 물꼬가 트이는 대목은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좀처럼 믿기 어려운 진실과 마주하고 누군가의 억울한 사연을 접하게 되면서, 타인의 감정을 읽어들이고 사건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어떻게든 이끌어야 하는 협상가의 역할에서 벗어나 점차 투사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손예진의 연기는 당찼다. 비리를 은밀한 방식으로 진두지휘해 왔으면서도 뻔뻔스레 이를 무마시키려는 파렴치한 앞에서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다."며 외치던 그녀의 미란다 원칙으로부터는 진실을 향한 간절함 따위가 전해져온다. 아울러 국정조사 증인으로 국회에 출석하여 읊어내려가던 증인 선서로부터는 비장함 따위가 묻어나온다. 이로써 영화 '덕혜옹주'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황녀 신분으로 일제에 충성하는 연설문을 읽는 대신 강제 징용된 한국인을 위로하는 내용의 연설문을 한국어로 또박또박 읽어내려가면서 관객에게 뭉클한 감동을 선사해주었던 신과는 또 다른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한편 현빈은 나긋나긋하면서도 결정적인 장면에서는 어느 누구보다 잔인한 면모를 드러내야 하는 외유내강형의 캐릭터이자, 강해 보이는 듯하다가도 어쩔 수 없이 여린 심성을 엿보이게 하는 비운의 캐릭터 민태구 역할에 아주 잘 녹아든 듯싶다. 인질범이 이렇게 멋지게 생겨도 될까 싶을 만큼 이번 작품 속에서 그의 외모는 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동안 식상한 범죄 장르 영화에 지쳤다면 조금은 색다른 소재를 다룬 이 작품에 주목해보자. 추석 명절, 팝콘과 함께 즐기기에 손색 없는 작품이다.



감독  이종석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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