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장르 넘나드는 놀라운 변주 '그대 눈동자에 건배'

새 날 2018. 9. 16.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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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흔히 흡인력이 강하다고들 한다. 일본 독자들의 경우 책을 한 번 펼쳐들면 단숨에 다 읽게 된다며 그의 작품에 매료된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의 소설을 비록 몇 권 접하지 못했으나, 이제껏 읽은 작품들을 기준으로 볼 때 그가 정성껏 창작해내고 꾸며낸 이야기들 가운데 우리 정서와 어긋나는 지점이 제법 있는 듯싶다.


짐작컨대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몰입감을 떨어뜨리게 했던 요소도 다름 아닌 그런 류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무려 9편의 단편소설이 한꺼번에 실린 이 소설집은 솔직히 작가의 매력에 도취된 일본인들만큼 단숨에 읽어 내려가기란 쉽지 않다. 며칠에 걸쳐 차근차근 읽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집중력이 다소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양한 소재와 장르들을 다룬 만큼 기대감이 상당했으나 내용은 솔직히 기대 이하였다. 다만, 적어도 미스터리부터 풍자와 SF, 그리고 감동 스토리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변주 솜씨만큼은 인정해주어야 할 것 같다.



새해 첫날 참배를 위해 신사로 향하던 부부가 신사 내에 쓰러져 있던 군수를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은 '새해 첫날의 결심'은 우스꽝스러운 풍자를 통해 보통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이야기하고 싶었겠으나, 아무래도 우리 정서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 대목이 많았던 까닭에 뒤따르는 감동이나 여운 따위도 그에 비례해 반감되었던 것 같다. 첫 작품부터 이러니 맥이 풀릴 수밖에.. 그러나 너무 걱정 마시라. 다행히 다음에 실린 '10년 만의 밸런타인데이'는 작가 특유의 전복과 반전이라는 미스터리적 속성이 잘 드러나 있는 까닭에 그나마 속도감 있게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아내를 멀리 떠나보낸 뒤 딸과 단 둘이서만 살아가던 아빠가 어느덧 딸 아이의 혼사를 치러야 하는 상황, 가뜩이나 엄격하고 까다로운 상대 집안 내력으로 인해 온갖 걱정과 근심을 안게 되나 의외의 사건으로 이를 모두 털어버리게 된다는 '오늘 밤은 나 홀로 히나마쓰리' 역시 정서는 우리와 잘 맞지 않으나 딸 아이를 향한 부정만큼은 만국 공통이기에 그나마 가까이 와닿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그대 눈동자에 건배'는 지명수배자의 특징을 간파해 불특정다수 속에서 범인을 찾아내는 미아타리 수사의 특별 직무를 소재로 다룬 까닭에 무척 흥미로운 건 사실이지만 예측 가능한 전개로 인해 결말은 영 싱겁게 다가온다. AI 기술이 탑재된 아기 로봇을 임차하여 벌어지는 '렌털 베이비'속 에피소드는 SF장르로서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기능을 선보이면서 가까운 미래 실제로 등장하게 될 서비스를 예견케 한다.


'고장난 시계'는 '10년 만의 밸런타인데이' 그리고 '크리스마스 미스터리'와 함께 가장 전형적인 작가 특유의 성향이 드러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전복과 반전이라는 쾌감을 즐기고 싶은 독자들에게 그나마 가장 흡인력 있게 다가올 작품일 것이라 장담한다. 9개의 단편 가운데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 두 개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난 당장 '고장난 시계'와 '크리스마스 미스터리'를 꼽고 싶다.



'사파이어의 기적'은 특히 반려동물인이라면 크게 공감할 만한 작품이다. 어머니 혼자 생계를 꾸려나가는 까닭에 친구들과 쉽게 어울릴 수 없었던 미쿠가 신사에 있는 고양이 한 마리와 우정을 쌓아가다가 이 고양이가 어느 날 돌연 사라진 뒤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어쩌면 미래에 실제로 일어날 법한 소재이기에 기대감을 갖게 하는 한편 그에 따르는 부작용 역시 우려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가슴 뭉클한 반려동물과의 우정을 SF적 요소와 뒤섞어놓은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수정 염주'는 겉으로는 항상 차갑지만 그 이면에는 어느 누구보다 따스함을 지닌 아버지의 아들을 향한 부정에 관해 수정 염주라는 매개를 통해 이야기를 펼치며 훈훈한 감동을 선사한다.


이 책은 미스터리 작가로 잘 알려진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 소설 모음집이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 독자에게 전복과 반전이라는 특별한 쾌감을 선사해주는 작가 특유의 추리 장르뿐 아니라 유쾌한 풍자와 해학, 미래의 모습을 활짝 펼쳐놓은 듯한 SF적 요소, 그리고 가슴 뭉클한 일상 이야기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동시에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저자  히가시노 게이고

역자  양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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