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모성애가 눈 뜨게 한 뜨악한 세상 '비밀은 없다'

새 날 2016. 6. 24.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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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련한 정치인에 맞선 신예 종찬(김주혁)은 이번 선거에서 국회 입성을 노리고 있다. 그의 아내 연홍(손예진) 역시 직접 남편의 선거운동을 돕는 등 종찬의 당선을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와중이다. 그런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첫날, 친구집에 놀러가겠다며 나간 딸 민진이가 밤 늦은 시각이 되어도 돌아오지를 않는다. 다음날 해가 뜨고 또 그 다음날이 되어도 당췌 딸은 돌아올 줄을 모른다. 실종이다. 


선거일을 코앞에 둔 종찬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으나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선거운동을 끝까지 치르기로 작정한다. 한편 연홍은 딸이 실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온통 선거에만 관심이 가 있는 남편이 야속한 데다가 성의를 보이지 않는 경찰마저 마뜩잖게 다가오자 그들을 뒤로 한 채 직접 딸을 찾아 나서는데...



딸의 실종 이후 연홍의 감정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를 탄 것마냥 혼란스럽기 짝이없다. 애끓는 모성애는 한없이 가냘퍼 보이는 한 여성을 무섭게 변화시켜 갔다. 때로는 실성한 사람처럼 정신줄을 놓거나, 악에 받친 채 분노를 마구 쏟아내곤 하던 그녀다. 정 붙일 데라고는 전혀 없는, 참담한 현실 때문에 발현되는 일종의 방어기제다. 


정치인의 아내인 탓에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녀를 대하는 태도에는 예우가 한껏 실린 듯싶으나, 이는 누가 보아도 지극히 형식적임을 깨닫게 한다. 더구나 연홍의 출신 지역이 알려진 뒤로는 따돌림을 당하는 느낌마저 확연하다. 말로 형언하기 힘든, 온통 그녀를 경계하는 듯한 묘한 분위기의 공기가 주변에 가득하다. 덕분에 실질적인 협조도 잘 이뤄지지 않는다. 



딸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찾으려는 이는 연홍이 유일하다. 남편과의 갈등이 최고조로 치달은 것도 딸의 실종 즈음부터다. 연홍의 입장에서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남편의 선거 캠프에서 24시간을 늘 함께하는 정치적 동지들마저도 신뢰할 수 없는 처지가 돼 버렸다. 선거철이면 오로지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만을 좇으며 철새처럼 옮겨다니는 사람들이 득시글거리고, 특정 지역 출신이라고 하면 내심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끝모를 지역감정의 골로 인해 그녀는 흡사 홀로 떨어진 외딴섬과 진배없다. 



"염병할.."이라는 연홍의 비속어가 관객에게 왠지 착착 달라붙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이렇듯 그녀의 복잡다단한 상황과 혼란스러운 심경이 자연스럽게 뱉어내는 그녀의 말에 고스란히 응축되어 표현된 탓이다. 연홍은 딸이 남긴 실낱 같은 흔적을 찾아 직접 뒤를 캐며 점차 사건의 실체에 조금씩 다가선다. 


딸의 실종 이후 그녀의 눈에 새롭게 드러나기 시작한 세상은 온통 부조리함 투성이다. 희망이란 보이지 않는다. 정치인들의 앞과 뒤가 다른 이율배반적인 행태야 이미 흔해 빠진 모습일 테고, 지역감정이 만들어내는 편견은 지독할 정도다. 개인적인 치부를 감추기 위해 돈으로 거래되어서는 안 될 것들이 버젓이 거래되고 있고, 순진해야 할 아이들은 어쩌면 어른들 이상으로 영악해져 버렸다. 물론 아이들의 현재 모습은 어른들의 그것을 그대로 투영한 것일 테니 아이들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편가르기는 일상이다. 지역사회는 지역감정을 이용하여 네편 내편을 나눠 약자를 만들어 그들을 막다른 곳으로 자꾸만 밀어내려 하고, 학교는 왕따를 이용, 적어도 그로부터 한 발자욱 정도 비껴나 있는 보통 아이들의 쌓인 분노를 표출하는 대상으로 삼기 일쑤다. 뒤틀린 약육강식의 사회 속에서 상대적인 약자로 내쳐진 연홍과 그녀의 딸 민진 앞에 놓인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이렇듯 온통 부조리한 세상에 한풀이를 하고 싶은 연홍이 빠져들게 된 건 다름아닌 점과 무속신앙이다. 점쟁이가 쌀알을 흔들며 부는 휘파람소리나 무당이 굿판을 벌이며 신명나게 휘두르는 칼과 춤사위에는 한없이 비틀어진 이 세상의 모순이 풍자적으로 담겨 있으며, 연홍의 혼란한 감정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연홍이 민진의 흔적을 쫓으면서 알게 된 딸의 면면은 결코 그녀가 알던 착한 딸의 그것이 아니다. 부모의 흔한 착각이다. 민진의 부모 역시 여느 부모들처럼 딸이 지니고 있던 아픔과 고통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그저 그런 사람들이었다. 우린 흔히 자기 자식만큼은 세상에서 부모가 가장 잘 알고 있다며 큰 소리 치기 일쑤이지만, 현실은 영화에서의 민진이와 부모의 관계처럼 어쩌면 부모와 자식 사이에 도저히 건널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커다란 강 하나가 놓여져 있는 건 아닐까? 


결국 종찬의 가족은 외양으로는 남부러울 것 전혀 없어 보이지만, 내면으로는 온통 상처와 위선 그리고 결함 투성이다. 우리네 보편적인 삶처럼 말이다.



모성애로 무장한 채 점차 분노 게이지를 높여가던 손예진의 연기 변신은 놀랍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 가냘픈 몸매에서 뿜어져나오는 독기 어린 에너지는 아마도 모성애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감독이 심혈을 기울였을 법한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은 눈과 귀를 즐겁게 하며, 스릴러 장르답게 점차 전모가 드러나는 사건의 실체를 통해 전복의 쾌감 내지 대리만족이라는 통쾌함 따위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게 해 준다. 


박찬욱 감독의 각본 참여는 장점이 될 수도 있겠으나,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짐짓 단점으로 작용하게 되지는 않을까 싶어 아주 조금은 염려스럽다. 누가 보아도 이경미 방식이라기보다 박찬욱 방식의 작품임을 더 쉽게 떠올릴 법하니 말이다.

 


감독  이경미


*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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