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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과 불의를 향한 일격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

새 날 2016. 6. 17.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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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태(김상호)는 딸 동현(김향기)과 함께 단둘이 살아가며 서로를 의지해오던 터다. 그러던 어느날 인천을 연고로 하는 재벌 그룹 '대해제철'의 며느리가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경찰은 이의 용의자로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인 택시 기사 순태를 지목한다. 순태는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며 억울함을 호소해 보지만 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언도, 졸지에 사형수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딸에게만큼은 절대로 자신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노라는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어떡하든 그는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와야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그의 눈에 뜨인 신문 기사 한 줄, 범죄자를 아버지로 두었으나 편견을 극복하고 모범 경찰이 된 필재(김명민)의 사연이었다. 그는 필재라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아 그에게 편지 한 통을 작성하여 보낸다. 하지만 필재는 이미 경찰 제복을 벗은 상황이다. 본의 아니게 변호사 판수(성동일) 밑에서 법조 브로커 역할을 담당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던 그다. 경찰이며 변호사며 그의 수완에 놀아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런 그의 손에 순태가 보낸 편지가 쥐어진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마침 대해제철 며느리 피살 사건을 담당했던 동료에 의해 경찰에서 물러나게 된 처지를 앙갚음하려던 필재에게 있어 순태의 편지는 왠지 구미가 당길 만한 소재다. 그는 순태를 면회하기 위해 딸 동현을 찾아가는데...



이 영화는 2002년 발생한 '영남제분 여대생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제작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감독 역시 “어떤 한 사건을 놓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들은 ‘영남제분 여대생 살인사건’ 등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었다”며 이를 부인하지 않고 있다. 알고 보면 꽤나 끔찍한 사건인데, 이렇듯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일들이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벌어진다는 사실은 적잖이 놀라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픽션이면서도 그저 픽션으로만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의 처지가 참으로 갑갑할 뿐이다.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돈은 최고다. 이는 어느 누가 됐든 이성적으로는 제아무리 아니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도, 현실적으로는 부인하기가 쉽지 않은 노릇이다.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심지어 돈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희생양 삼기도 한다. 순태는 대해제철의 며느리를 잠시 택시에 태웠다는 이유와 과거 전과 행적이 그에 덧대어지며 졸지에 사형수가 되고 만다. 알리바이 따위는 모두 그가 범인이라는 사실에 맞춰져 조작되기 일쑤다. 우리의 머릿속에 견고하게 굳어진 편견은 몸에 문신이 그려져 있는 등 과거 그의 범죄 행적을 빌미 삼아 그를 족쇄에 가두게 하고, 영락없는 살인범으로 둔갑시키고 만다. 



모든 일은 돈으로 시작하여 돈으로 끝난다. 영화는 이러한 사실을 아주 친절하면서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더 불편하다. 그의 매개는 다름아닌 사건 브로커인 필재다. 그는 늘 돈 봉투를 달고 다닌다. 그 행동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주변인들도 놀랄 정도다. 이는 곳곳에 뿌리는 만큼 고스란히 결과로 반영되어 돌아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필재가 뿌리고 다니는 푼돈을 일종의 기름칠이라고 한다면, 대해제철 사모님이 뿌리고 다니는 돈은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준이라 할 만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별 게 아니다. 작품 속에서의 다분히 의도적인 장치로 읽히는 이들의 돈 장난은 자본주의체제의 본질을 꿰뚫는 느낌이다.



필재는 영화 '성난 변호사'에서의 이선균 캐릭터와 흡사하다. 업계에서 내로라할 정도로 능력이 출중한 면도 그렇고, 재벌과 연루된 살인사건에 뛰어든 배경 역시 엇비슷하다. 절대로 정의감 내지 사명감 따위의 정제된 감정으로 일에 매달리지 않는 성품 또한 마찬가지다. 두 사람 모두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할 뿐이다. 다만, 사건을 파헤쳐가면서 점차 들춰지는 재벌의 추악한 이면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 그들은 결국 본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진실에 온몸을 내맡기게 된다. 이들은 절대로 영웅 캐릭터가 아니다.



국민 엄마로 불리는 김영애 씨, 겉으로는 우아하면서도 온화한 듯한 외양을 드러내지만, 본성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재벌 사모님으로 변신, 섬찟하면서도 히스테릭한 연기의 정수를 선보인다. 일반적으로 연륜의 흔적으로 다가올 법한 미세한 주름은 이 영화에서만큼은 사모님의 신경질적인 내면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장치가 되어준다. 사모님 캐릭터를 보는 순간, 전혀 다른 내용이긴 하나 언뜻 이러한 제목의 영화가 떠올랐다. '우아한 거짓말'.. 


그런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우아한 거짓말'에서 자살을 시도하여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던 김향기 양이 이번 작품에서 동현 캐릭터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김명민과 찰떡궁합 콤비를 이룬 성동일은 예상했던 대로 웃음 코드를 전담하고 있었다. 



법조 브로커, 억울한 사형수, 조직 폭력배, 재벌 사모님 등 영화속 등장인물 및 캐릭터의 면면과 제목 그리고 포스터만으로도 대충 어떠한 결말로 흘러가게 될지 가늠이 될 만큼 뻔한 장르의 영화다. 실제로 이야기 얼개는 나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때로는 통쾌하고 때로는 코믹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무언가 엉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하는 건 아마도 중간중간 벌어지는 사건의 개연성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는 김상호를 비롯한 배우들의 열연에 다소 빛을 바라게 하는 요소로 작용할 법하다.



감독  권종관


*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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