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치명적인 매혹 통쾌한 카타르시스 '아가씨'

새 날 2016. 6. 2.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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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일찍 여의고 후견인인 이모부(조진웅)의 보살핌 아래 매우 엄격한 환경에서 살아오던 귀족 아가씨(김민희)에게, 어느날 그녀와의 결혼을 약속한 백작(하정우)의 추천으로 새로운 하녀(김태리)가 배속된다. 그런데 사실은 백작의 경우 돈 냄새를 기가 막힐 정도로 잘 맡는 노련한 전문 사기꾼 신분이었으며, 아가씨의 하녀를 자임한 숙희 역시 장물아비의 손에서 자라온 고아 출신의 전문 소매치기 신분이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귀족 신분인 아가씨의 재산을 노린 채 이를 가로채기 위해 함께 손을 맞잡은 관계다. 


숙희의 눈에는 아가씨의 존재란 험한 세상이라곤 단 한 차례조차 경험해보지 못한, 마치 순백과도 같은 순수함으로 비치던 와중이다. 두 사람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서로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통제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마저 싹트기 시작한다. 한편 백작은 자신을 향한 아가씨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접촉면을 점차 넓혀가며 그녀와의 결혼을 서두르는데...



러닝타임이 무려 2시간 30분에 이를 만큼 길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는 총 3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백작과 숙희의 작당모의 끝에 이들의 아가씨에 대한 유린 내용을 숙희의 시선을 통해 보여주고 있고, 2부는 아가씨가 살아온 범상치 않은 환경 그리고 숙희와 백작이 자신에게 접근해온 이후 저택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온전히 아가씨의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3부는 에필로그다. 이렇듯 총 3부로 나눠 각기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 시도는 참신한 대목이다.



아가씨가 살고 있는 저택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수많은 벽과 벽이 서로를 가로막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공간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고,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는 다름아닌 미닫이문이다. 이들 사이에 위치한 각 공간은 흡사 무언가 비밀을 간직하기라도 한 양 온통 적막감만 감도는 상황이다. 다만, 이모부가 주로 거처하며 활동하는 지하만큼은 저택 내에서 그나마 가장 활성화된 공간이다. 물론 이곳은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된 공간이기도 하다. 모든 모순은 바로 이곳, 그러니까 저택의 지하 공간과 이모부로부터 출발한다. 아가씨는 늘 여기서의 탈출을 꿈꾸고 있으나 그녀의 이모(문소리)가 그랬듯이 탈출 방법이란 어이없게도 저택 앞마당의 유난히 큰 벚나무에 목을 매는 일이었다. 



하지만 숙희가 들어온 이래 저택에서는 무언가 작은 변화들이 감지된다. 물론 각기 다른 계획과 음모가 서로 얽히며 상충하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그보다는 진정성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강한 힘이 그들 사이에서 인력과 척력의 형태로 각기 작용하고 있는 탓이다. 거짓과 음모가 판을 치며 서로가 서로를 속고 속이는 비정한 세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역경을 버텨내며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유일한 희망은 바로 진정성이었던 셈이다. 



아가씨를 비롯한 귀족이 머무는 저택은 규모도 규모지만, 그로부터 뿜어져나오는 기운은 예사롭지가 않다. 왠지 음험하다. 아니나 다를까? 저택을 빈번하게 왕래하며 지하 공간에 모여 회합을 갖는 또 다른 귀족들의 행태는 점잖은 겉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일제강점기라는 그 어수선한 때에 양복을 쫙 빼입은 채 고급 승용차를 타고 대저택에 모여 점잖게 둘러앉아 그들이 고작 벌이는 일이란, 알고 보면 그야말로 실소가 절로 나오게 할 법한 행위에 다름아니다. 아가씨를 어릴적부터 후견인이라는 명분으로 엄하게 키워온 이모부는 모순으로 얼룩진 이 세상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으며, 본질적으로는 사기꾼인 백작과도 그 성향이 맞닿아 있다.



아가씨 역을 맡은 김민희의 순수함과 노련함이라는, 극과 극을 오가는 팔색조 연기는 이번 작품 속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요소다. 아울러 김태리라는 대형 신인의 발굴도 이 영화의 커다란 수확 중 하나일 테며, 하정우의 뻔뻔하지만 왠지 밉살스럽지 않은 사기꾼 캐릭터는 그들과 조화를 잘 이룬다. 이번 연기 때문에 일부러 살을 뺐다고 하는 조진웅의 능청스러운 노인 연기는 감칠맛이 느껴지며, 중견 연기자인 김해숙과 문소리의 출연도 연기 앙상블에 힘을 보태고 있는 모양새다.


이 영화는 겉으로는 매우 점잖으며 근엄해 보이나 실은 그 이면에는 온통 뒤틀리고 비틀어진 것들로 가득찬 현실 세계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며, 이를 속시원하게 전복시키는 통쾌함 따위를 선사해준다. 때문에 일종의 판타지 장르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입안에서 살살 녹는 사탕처럼 달콤한 유혹의 이면에는 온갖 음흉한 계략을 숨겨놓은 채 자신에게 이득으로 다가오는 것들만 취하고 나머지는 갖다버리는, 진정성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과 세상이 존재한다. '사기꾼도 사랑을 해요?' 라는 아가씨의 일갈은 그래서 우리의 답답한 마음을 후련하게 해주며, 씁쓸하기 짝이없는 웃음과 동시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해준다. 스크린 위로 아스라이 펼쳐지는 영상은 가히 매혹적이라 할 만큼 아름답다. 진부하지 않은 소재와 스토리는 높은 흡인력을 보장해준다. 후한 점수를 주고 싶은 영화다.



감독  박찬욱


*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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